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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n 25. 2023

22. 명상의 분류

명상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앞에서 명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이제는 이렇게 광범위한 명상을 어떻게 분류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명상을 분류하는 방식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명상의 기법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도 있고, 명상의 발생방식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고, 명상의 역사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 괴로움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해결하는지, 또한 괴로움을 어디까지 없앨 수 있는지에 따라 분류하려고 한다.      


명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명상

2.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3. 마음에서 벗어나는 명상     


이 방식의 분류는 다음의 예시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그릇에 흙탕물이 담겨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그릇은 늘 움직인다. 늘 움직이는 그릇 속에 있는 흙탕물은 언제나 출렁이며 혼탁하고, 때론 흘러넘치기까지 한다.      


그릇에 따라 어떤 그릇은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어떤 그릇은 과격하게 움직인다. 이 중에서 과격하게 움직이는 그릇을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하면 출렁임과 혼탁함은 잦아들고 밖으로 물이 넘쳐흐르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이 그릇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면 그릇 속의 흙탕물은 그제야 출렁임이 멈추게 된다. 출렁임이 멈추고 나면 흙탕물 속에 있던 무거운 흙 알갱이들은 아래로 가라앉고 위에는 비교적 맑은 물만 남게 된다. 혼탁함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그릇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릇이 다시 움직이게 되면 다시 출렁임이 일고 맑아진 것처럼 보였던 물은 다시 흙탕물이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나는 움직임이 멈췄을 때 아래에 가라앉은 흙 알갱이를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릇에 대한 흙탕물의 비율이 낮아지게 된다. 만약 그릇이 무한대로 커지면 흙탕물의 비율은 0(영)에 수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그릇은 ‘나’이고 움직임은 ‘욕망’이며 흙탕물은 ‘번뇌’이다.      


이처럼 과격하게 움직이는 그릇을 부드럽게 움직이게 하는 명상은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명상’이고, 그릇을 멈추고 지켜보는 명상은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이며, 흙 알갱이를 없애면서 동시에 그릇을 키워나가는 명상은 ‘마음에서 벗어나는 명상’이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명상


제일 먼저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명상은 과격하게 움직이는 그릇을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마음에 위안을 주는 힐링명상 종류이다. 이 명상법은 강퍅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그와 동시에,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고 힐링해 주는 명상을 의미한다. 이런 위로와 힐링을 통해 마음의 긴장을 이완시켜 준다. 이것은 마음에 일어난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과 같다. 몸에 가벼운 상처나 가벼운 병에 걸렸을 때, 약을 바르거나 복용하는 것과 같다. 스트레스와 같은 가벼운 괴로움이 마음에 출렁거릴 때, 힐링명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음악명상, 싱잉볼명상, 미술명상, 요가명상 등등,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명상법들을 의미한다. 이런 명상법들은 근본적인 치료법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깊은 상처나 무거운 병에 걸렸을 때, 이런 명상법들은 통용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이때 필요한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은 그릇을 멈추고 흙 알갱이를 가라앉히는 방법과 그 이후에 맑아진 물속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하나는 마음에 일어나는 괴로움을 집중을 통해 이완시켜 고요함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이치를 살펴본 뒤 마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제거해 나가는 방식이다.

여기에 따로 얘기할 ‘마음챙김’의 개념이 나오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챙김이란 ‘마음을 챙기는 자’와 ‘마음챙김을 당하는 자’가 존재하게 된다. 마음에 괴로움이 생겼을 때 마음을 다스리는 자를 만들어서 괴로운 마음을 다스려 나간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현대서구명상이 있다.      


현대명상은 대표적으로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

MBCT(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hy):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인지치료

ACT(Acceptance Commitment Therapy): 수용전념치료

DBT(Dialectical Behavioral Therapy): 변증법적 행동치료

CBT(Cognitive Behavioral Therapy): 인지행동치료  등이 있다.      


복잡한 듯 보이고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마음챙김이란 단어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고 다른 심리학적인 기법을 사용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비슷한 내용을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 같다. 모두 마음챙김이라는 개념을 고유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만든 치유법들일뿐이다. 

이외에도 MSC (Mindful Self-Compassion)이라고 하는 마음챙김 자기연민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명상법이다.     


이런 현대 명상법들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심리학적으로 재해석된 명상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병을 전제로 한다. 즉,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일 뿐, 나아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영역엔 접근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다양한 심리치료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계에 근거한 과학이라는 포장지는 늘 새로운 가설과 실험을 통해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명상에서 과학적 증명이라는 이름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마음을 벗어나는 명상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마음을 벗어나는 명상은 

 ‘마음을 챙기는 자’도 없애고 ‘마음챙김을 당하는 자’도 없애자는 것이다. 보통 명상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마음을 챙긴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을 챙긴다고 생각한 순간 ‘마음을 챙긴 자’는 ‘마음 챙김을 당하는 자’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객관이 주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늘 되돌이표처럼 원래의 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벗어나는 명상법은 현대서구의 심리명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중에 하나는 남방상좌부불교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명상이다.

사마타명상은 간단히 말해서 삼매에 들어가는 명상법이다. 삼매에 대한 정의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삼매는 고요함을 의미한다. 즉 집중을 통해 몰입에 들어가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욕망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위빠사나명상은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사띠(sati)’를 확립하는 기법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다. 욕망을 사용하는 자신이 아니라, 요즘 말하는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사용하는 자를 욕망을 사용하지 않는 자가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서 욕망을 관찰하면 욕망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이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중과 통찰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깊은 집중을 통해 선정에 들고 통찰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동북아대승불교, 특히 선불교의 입장에서 이런 수행법을 지관법(止觀法)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선(禪)명상이다. 이 명상법은 나를 속박하고 있는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세계를 허무는 데서 시작한다. 보통 사람은 나라고 하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런 인식은 감각과 감정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생각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늘 머리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늘 생각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성을 인식한다.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언어를 문자로 기록한다. 그래서 이런 문자의 세계,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이루는 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구속하고 있는 인식의 세계를 점점 더 넓혀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고, 이것은 ‘의식으로서의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존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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