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책방 위치를 정하는 일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책방 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보다 훨씬 더 심경이 복잡해졌다. 장소를 물색하기 앞서 두 가지 요건을 세워두었다. 하나는 장소의 의외성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비용의 최소화였다.
‘의외의’ 장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대학로 뒤편의 이화마을을 다녀온 뒤였다. 번화한 시내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10분쯤 걸었을까.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작고 야무진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산동네다. 이화마을의 담벼락과 계단은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명 가수가 다녀간 날개 벽화 앞은 인증샷을 남기려는 중국인 관광객과 커플 들로 인산인해다.
사람들을 피해 낙산공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단 몇 개를 더 올랐을 뿐인데 분위기며 공기가 사뭇 다르다. 퇴근길 정체가 시작된 서울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가만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저 혼자 성곽길을 걷는 젊은 여성과 장바구니를 양손에 쥔 아주머니, 뜀박질하는 개를 따라 마지못해 달리는 아저씨의 엉거주춤한 뒷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야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익숙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이 나를 설레게 했다.
인테리어에만 관심이 쏠려 있던 나는 그날 이후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책방이 자리한 거리의 풍경, 건물의 형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보았다. 책방을 찾아오는 길이 마치 낯선 도시를 방문하는 여정과 같으면 어떨까. 새로 산 책을 손에 쥐고서 주변을 산책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여행책방이라는 이미지를 보다 구체적인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을 텐데. 곧장 이화마을 주변의 부동산을 찾아 나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몇 년째 재개발구역으로 묶여 있는 탓에 상업용 매물이 전무한 상태였다. 다른 데를 알아보라며 내게 조언한 아저씨는 생수통과 소주가 물건의 전부인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를 부동산 한쪽에 운영 중이었다.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한다는 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는 이가 흔치 않거니와 그렇다 한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그’인지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조건에 근접한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서울에서 보증금 500만 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시설이 몹시 형편없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집에서 가까운 마포구 성산동을 시작으로 망원동, 연희동, 연남동을 지나 탐색 반경은 종로, 용산까지 점점 넓어졌다. 허탕 치는 날이 잦아질수록 자책의 강도 역시 드세졌다. 회사를 관둔 지 벌써 반년이 지났건만 오픈 준비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당당하게 사표를 들이밀던 호기로움이 철딱서니 없는 치기로 둔갑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큰 기대 없이 찾아간 염리동 소금길은 이화마을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음산한 골목길을 벽화로 화사하게 꾸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다른 한쪽은 재개발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나름 신경 써서 칠했을 골목 벽화는 안 하느니만 못해 보였다. 촌스럽고 요란한 벽화만 제외하면 동네 분위기는 정다웠다.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동네였다. 트렌디한 카페와 상점 대신 주민들이 애용하는 마트와 세탁소, 수선집, 목욕탕이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가쁜 숨을 삼키며 계단 끝까지 오르자 신촌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낙산공원처럼 낭만적인 전망은 아니었다. 엉킨 전깃줄이 하늘을 가렸고 골목마다 낡은 집들이 퇴적층처럼 쌓여 있었다. 이곳이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이 맞나 싶었다. 순간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나는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바로 이 사람이구나!
동행한 공인중개사가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텅 빈 공간은 늦가을의 붉은 노을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각형에 가까운 독특한 바닥과 벽 두 면을 감싼 통창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다세대주택뿐인 동네라 한적하면서도 이대역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역세권이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지금 놓치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함이 뒤섞인 두근거림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보증금과 월세를 물어보았다.
“천에 사십입니다.”
가능도 불가능도 아닌 애매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공인중개사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보증금을 절반으로 깎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보증금을 절반으로 흔쾌히 내려주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뜨악함과 마침내 공간을 마련했다는 개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두 개의 마음이 앞다투는 바람에 지금 이 감정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일 눈을 뜨고 난 뒤에야 상황이 파악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