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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Mar 27. 2018

18,330원어치의 하루

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사선으로 깊이 들어오는 볕 덕분에 아직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책방도 덩달아 화사해 보인다. 칠하느라 내내 애먹었던 알루미늄 문틀의 푸른색이 보기 좋게 빛났다. 


전날 밤 간신히 정리를 끝낸 탓에 손님 맞을 자세를 갖춘 책방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라고는 벽에 설치한 2미터 너비의 다섯 칸짜리 찬넬 선반과 매대용 원목 테이블, 이케아 3단 선반장, 스툴 네 개, 업무용 책상이 전부. 단출한 구색이지만 무엇 하나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공간을 계약한 지 불과 30일 만에 부랴부랴 책방을 열었다. 부동산 투어를 뛰고, 도서 목록을 짜고, 인테리어 자재를 사러 을지로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 시간을 포함하면 6개월 가까이 걸린 셈이지만 제대로 이 일에 뛰어든 건 임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직후였다. 월세 압박도 부담스러웠고 성에 찰 때까지 준비만 하다간 영영 시작도 못 할 것 같았다. 


매일 텅 빈 공간에 혼자 나와 작업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일이었다. 적막을 감추기 위해 틀어둔 라디오의 재밌는 사연에도 시원하게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 때로는 7.5평의 좁은 공간이 망망대해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제때 책방을 오픈할 수 있을까, 연다 한들 사람들이 오기는 할까, 월세는 낼 수 있을까. 온종일 나와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엄청난 감정 소모가 뒤따랐다.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다던 선배 책방지기들의 조언은 그때마다 큰 힘이 됐다. 







개업 시루떡은 이대역 근처에서 급히 사 왔다. 1층을 나눠 쓰는 옆집 미용실과 위층에 사는 주인집, 건너편 이웃집에 떡을 돌리며 잘 부탁한다 인사드렸다. 하루 한 번씩 고개를 빼꼼 들이밀며 진행 상황을 묻던 이웃 아주머니들은 정작 책방을 오픈하고 나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지켜보는 눈치였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오픈 공지에는 축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책방을 열기 전부터 SNS를 운영해야 한다는 조언에 냉큼 계정부터 개설했는데 그새 300명 정도 팔로워가 늘었다. 생소한 염리동 골목과 책방 준비 과정을 올린 게 효과를 본 듯했다. 아직 간판도 달지 않은 일단멈춤의 시작을 응원하고 기다려준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스스럼없이 격려의 메시지를 남겨준 것이 그저 놀라웠다.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온라인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마음과 시간을 내 책방을 찾는 행동이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러다 하루종일 나와 J 두 사람만 덜렁 앉아 있다 돌아가면 어쩌나 싶을 즈음 마침내 첫 손님이 등장했다. 알고 보니 독립출판물을 입고하러 온 제작자였다. 이미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막상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려니 영 쑥스러웠다. 저자에게 직접 책을 건네받는 상황도 익숙지 않았다. 책에 대해 칭찬하자니 너무 호들갑스럽고, 간단히 인사만 건네자니 머쓱했다. 인턴으로 첫 출근한 날,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급체했던 스물셋의 나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다. 얼굴 표정, 동작 하나하나 모두 서툴다. 그럼에도 제작자와 일대일로 만나는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가상의 목소리로 존재했던 텍스트에 글쓴이의 목소리, 눈빛, 미소가 덧입혀지고 나자 같은 책도 달리 보였다. 


그 뒤로도 독립출판물 제작자 서넛이 입고 겸 책방을 방문했다. 서로의 책과 공간을 칭찬하며 덕담을 주고받는 동안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었다. 오직 책 구입을 목적으로 온 손님이 없는 와중에도 매상을 올렸다는 사실이 심심한 위로가 됐다. 


『러브앤프리』,다카하시아유무
『배를 놓치고, 기차에서 내리다』, 이화열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뱅상 누아유 

『트루 포틀랜드』, BRIDGE LAB 


네 권의 책과 두 권의 노트, 엽서 두 장과 포스터 한 장을 판매했다. 사정상 한 권씩만 들여놓은 단행본은 판매와 동시에 재고 0권이 됐다. 총 판매액은 67,900원. 도서 공급률과 입고 수수료를 감안하면 순이익은 18,330원. 오늘 하루 치의 노동 시간과 수고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액수 18,330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달의 성과와 무관하게 성실히 입금되던 월급이 잠시 떠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릿속을 부유하는 고민들을 쓸어 모아 한쪽 구석에 슬며시 밀어두었다. 우선은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J를 위한 수입 맥주 한 캔과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파인트를 사야겠다. 오늘 밤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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