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인 생활을 바로잡을 때 나는 냉장고부터 살핀다
지난 3년간 체중이 5~6킬로그램씩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대개 이런 식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면서 체력이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한다. 이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식습관이다. 시리얼과 과자로 대충 허기를 달래다가 새벽녘 야식 파티를 벌인 뒤 소화가 채 되기도 전에 지쳐 잠드는 생활이 반복된다. 그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다. 하루 세 번 설사를 하고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퍼질 즈음, 이전보다 유난스러 워진 생리통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책장에 꽂힌 요리책을 꺼내드는것이다.
엉망인 생활을 바로잡을 때 나는 냉장고부터 살핀다. 방치된 냉장고 안은 이미 도처에 피로와 무력감이 퍼져 있다는 증거. 계절이 뒤섞인 옷장과 잎사귀 끝이 바짝 마른 화분도 그중 일부다.
하루는 오밤중에 채수 끓이기에 나섰다. 조용한 부엌에서 파 뿌리에 묻은 흙을 꼼꼼히 씻고, 텀벙텀벙 무를 썰고, 울면서 양파 껍질을 깠다. 그런 다음 1년에 한두번 쓸까 한 커다란 양수 냄비를 꺼내 손질한 채소를 쏟아부었다. 마침 친구가 소분해 준 백령도산 다시마도 있길래 함께 넣었다. 이제 냄비를 중불에 올릴 차례. 그런데 무작정 끓이기만 해선 안 되고, 채수가 끓어오를 때마다 일정량의 물을 보충해야 한다. 이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한다. 그런 뒤 약불로 줄여 30분 동안 우려내면 마침내 완성.
채수를 만드는 과정은 특별한 솜씨나 요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될 뿐이다. 이렇게 완성한 채수는 여기저기 쓸모가 많다. 채수를 베이스로 찌개와 국을 끓여도 좋고 수프나 스튜 같은 서양식 요리에도 활용할 수 있다. 어떤 재료든 넣고 끓이기만 하면 근사한 맛이 나올 거라는 기대가 든다.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야심한 밤에 이토록 호들갑을 떤 건. 채수를 끓이는 동안 어쩐지 나는 내 생활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무엇도 할 수 없는 기분에서 적어도 한끼 식사를 차려 낼 기운을 얻었다. 텅 빈 냉장고에 채수 한 병을 갖춰둔 것만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때로는 식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그저 허기를 잠재울 정도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라서, 기어이 밥에 집착한다. 그리고 매일 고민한다. 오늘은 뭘 먹을까. 아시다시피 이건 아주 좋은 징조다. 얼마 전에는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친구 다영이 우리 집 현관에 아스파라거스 한 봉지를 걸어두고 갔다. 밭농사를 짓는 아빠는 감자에 이어 고구마 한 박스를 택배로 올려 보냈다.나는 그것을 작은 박스에 소분해 혼자 사는 친구와 나눠 가졌다.
다름 아닌 밥심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도닥일 수 있다고 믿는 건, 역시나 너무 한국적인 마인드일까. 전화 통화 말미마다 굶고 다니지 말라는 엄마의 14년째 당부를 그래서 흘려들을 수가 없다.
도서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의 본문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전문은 종이책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