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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May 22. 2020

통장 잔고의 적정 금액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위하여


통장에 얼마쯤 돈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까. 한 달, 1년 단위로 정한 목표 수입을 달성하면 당분간 일을 하지 않는다던 프리랜서를 만난 적 있다. 생각만큼 큰 액수는 아니었다. 한 달간 알뜰하게 유럽 여행을 다녀 올 수 있을 정도의 금액. 동남아라면 좀 더 오래 버텨볼 수도 있겠다. 


그때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떠올린 액수는 500만 원이었다. 물론 이것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500만 원은,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일을 쉴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일종의 위로금 같은 것이다. 현실은 ‘일단 멈’ 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좀 더 버틸 만해진다. 


퇴사와 창업 관련한 조언을 들어보면 6개월 내지 1년 치 생활비가 확보된 다음 실행에 옮기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나 또한 비슷한 요지의 말을 자주 했었다. 내가 나를 잃지 않은 채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은 전적으로 통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실업급여도 마찬가지다. 생활비에 쫓겨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직장에 덜컥 재취업한 뒤 ‘내가 이러려고 퇴사했나’ 후회하는 사태를 방지해 준다. 더불어 재충전의 시간과 다음을 모색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올해 나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 꽤 많은 지출을 했다. 각종 강연과 모임에 참여하느라, 커뮤니티 서비스에 가입하고 사람을 만나느라 모아둔 비상금이 반토막 났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쓰기까지 꼬박 1년을 갈등했다. 지금도 나는 결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프리랜서로 번 수입보다 씀씀이가 크다는 사실에, 더구나 그 지출이 일종의 취미 활동처럼 여겨질 때마다 분수에 맞지 않은 허영을 부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일배움카드 발급이 기뻤던 건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제과제빵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비건 베이킹을 공부하기 앞서 기초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나아가 베이킹을 내 미래와 연결지을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혹여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 또한 나름의 수확일 테고. 하지만 그 모든 기회비용을 선뜻 지불하기엔 망설임이 앞섰다. 비단 통장 잔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장의 지출로 인해 생활이 흔들리진 않겠지만 언제라도 그럴 가능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공포. 오랜 시간 내면화된 그 불안에 나는 어김없이 흔들렸다. 그러던 중 발급받은 내일배움카드는 인생을 계획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 셈이다. 



“아동, 노인을 포함한 모든 개인에게 2021년부터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 


LAB2050의 국민기본소득제 연구 결과 발표회를 다룬 기사였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전 사회 구성원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일한 금액을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기존의 사회 서비스와 달리 기본소득은 자신의 가난과 노동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또한 가족 단위 중심에서 벗어나 1인 가구, 여성, 아동, 청소년 등 각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이 전달된다. 그런데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반응이 있다. 그렇게 나랏돈을 퍼주면 나태해지지 않겠냐는 것. 


우리는 왜 일을 할까. 번뜩 떠오르는, 가장 쉬운 대답은 먹고살기 위해서다. 먹고살기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선택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참고 견딘다. 정말로 꿈꿔왔던 일은 따로 있지만 주어진 환경 안에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 지금의 결과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물론 운이 좋다면 약간의 보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먹고 살 만해진 상황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주저 없이 일하지 않기를 선택하게  될까. 매달 현금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으로 베짱이처럼 살기를 원할까. 어쩌면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누가 자처해서 일개미가 되길 바라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즈음, 자발적으로 일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신 이때의 일은 이전과 다르다.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재밌는 일,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 일.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동시에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바라는 존재여서 늘 갈등에 놓인다. 안정적인 지위와 연봉에 만족하지 못해 퇴사를 고민하고, 업무에 자신을 갈아 넣는 중에도 어떻게든 취미를 찾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건 결국 먹고사는 게 전부일 리 없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먹고살 만한 사람이 많을수록 프리랜서의 비율도 나란히 증가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그 프리랜서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프리’한 삶을 쟁취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건 비로소 안심하는 삶, 다시 말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다. 



도서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의 본문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전문은 종이책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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