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베이스 사고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모든 걸 다시 생각해 보는 방법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본질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존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해 보는 사고법이다.
제로베이스 사고에 대한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3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한 제로베이스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제로베이스 사고를 방해하는 망상활성계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해 볼 것이다.
사례 1.
'엘리베이터가 빨라지게 하는 법'에 관한 에피소드는 한 번쯤 들은 적이 있을 것 같다.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붙이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한 이야기다. 거울을 보며 외모를 체크하다 보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해 느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거울 볼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물리적 속도의 문제를 심리적 속도로 해결했다.
사례 2.
요즘은 거의 모든 달력이 12월부터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 처음은 아메리칸 홈 보험사다. 1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있는 달력이 표준이던 시절에 그들은 12월부터 시작하는 달력을 만들어 고객사에 배포했다. 타 회사보다 한 달 앞서 고객의 사무실에 그들의 달력을 걸게 하여 경쟁사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오래 그들의 존재를 노출시키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기존의 틀을 부순 멋지고 실용적인 아이디어였다.
사례 3.
스승이 제자에게 문제를 낸다. 선을 하나 그어 놓고는 그 선을 건드리지 않고 짧아지게 해보라 한다. 제자는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선을 짧아지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심히 지켜보던 스승은 그려진 선 아래에 또 하나의 선을 그었다. 먼저 그려져 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러니 자연스럽게 먼저 그려져 있던 선은 짧은 선이 되었다. 선이 짧아지기 위해서 그 자체가 짧아지란 법은 없다. 더 긴 선이 옆에 있으면 짧은 선이 되는 것이다. 선이 짧아진 게 맞으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노트 만들다가 경험한 제로베이스 사고.
나는 크린룸이란 곳에서 근무를 한다. 이름처럼 깨끗한 곳이다. 그리고 1년 내내 가을 같은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보안의 이유로 스마트폰 소지가 금지되는 것과 PC는 있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는 건 좋지 않은 환경이다.
좋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근무 중 몰래 브런치를 한다던가 쿠팡에서 구매욕구를 충족시키는 등의 딴짓을 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딴짓을 하고 싶었고, 내 딴에는 딴짓이라고 시작한 게 수제 노트 만들기였다. 만들다 보니 지금까지 약 20권 정도 만들었다. 이 수제 노트를 만드는 과정에 제로베이스 사고를 경험했다.
회사에 이면지가 굉장히 많았다. 펀칭기와 미니 재단기도 있었고, 촌스럽지만 은색의 카드링도 있었다. 이면지를 원하는 사이즈로 재단해서 펀칭기로 구멍을 뚫고 카드링을 채우면 노트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 마자 얼른 뚝딱 한 권을 만들어 보았다. 별것 아니지만 내가 자르고 뚫고 엮어 만들다 보니 '만든 정' 같은 게 생겼는지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이면지 재활용이란 게 의미롭기도 했다. 만드는 재미까지 포함한 이런저런 느낌이 종합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게 이렇게 기분 좋을 거면 이왕 만드는 거 더 예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특히 은색의 촌스러운 카드링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만 바꾸면 노트가 더 근사해질 것 같았다.
나는 '것 같은'은 느낌이 들면 실행력이 높아진다. 예쁜 카드링을 채우면 노트가 더 예뻐질 '것 같은' 생각에 당장 다이소로 갔다. 촌스러운 은색의 카드링이 사이즈별로 있었고, 그 옆에 플라스틱 카드링이 있었는데 사이즈는 하나지만 다양한 색깔로 구성되어 있었다. 컬러풀한데 싸구려 티가 나지 않는 색감이 마음에 들어 바로 구매했다.
회사에서 딴짓거리 할 틈이 생기자마자 이면지를 자르고 구멍을 낸 후 다이소에서 구매한 컬러풀한 카드링을 채웠다. 이번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커버도 만들어 맨 앞과 맨 뒤에 위치시켰다. 컬러풀한 카드링으로 바꾸니 역시나 노트의 때깔부터 달라 보였다. 수제의 느낌이 깃든 제법 근사한 노트가 되었다. 노트를 손에 들고 흐뭇하게 보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 보았다
하지만 노트는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카드링 사이즈가 작아서 노트가 180도로 펼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특별하고 재밌고 의미로움으로 종합적 기쁨을 느꼈던 마음이 좌절과 황당함으로 다시 종합되어 기쁨과는 멀어져 간 마음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더 큰 사이즈의 카드링을 사면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라 생각하고 쿠팡에 검색을 했다. 역시 쿠팡이었다. 다이소에서 샀던 컬러풀한 카드링과 동일하면서 한 사이즈 더 큰 제품이 있었다. 당장 구매를 진행했고 다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로켓처럼 카드링이 배송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곤란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카드링이 너무 커서 발란스가 맞지 않았다.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모든 대형마트를 가봤지만 딱 알맞은 사이즈의 컬러풀한 카드링은 없었다. 촌스러운 은색 카드링만 딱 사이즈가 맞았다. 수제 노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합리화를 시작했다. "겉이 그리 중요하진 않지, 특히 노트는 겉 보다 속에 쓰일 내용이 중요하지."라는 뻔한 말로 합리화를 하며 그냥 은색의 카드링을 채워서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보였는데, 그게 카드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문제 해결은 간단했다. 생각의 초점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원하는 사이즈의 컬러풀한 카드링만 찾던 나는 다른 것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원하는 사이즈가 없어 컬러풀한 카드링을 포기하는 순간 즉, 카드링에서 초점을 거두는 순간 다른 것을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펀칭의 위치가 보였다. 펀칭의 위치에 따라 카드링이 감당해야 할 두께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카드링이 감당해야 할 두께가 얇아지면 더 큰 사이즈의 카드링이 없어도 된다. 처음에 펀칭한 위치에서 조금만 옆으로 옮겨 카드링이 감당해야 할 두께를 얇게 해 주니 처음에 다이소에서 샀던 컬러풀한 카드링을 채우고 노트를 180도 펼칠 수 있었다.
왼쪽의 펀칭 위치는 카드링이 감당해야 할 두께가 두껍고 오른쪽은 보다 얇다 카드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다른 것을 보지 못했고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카드링'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펼쳐지지 않음'이었고 펀칭의 위치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트는 마음에 쏙 들었다. 회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자투리 시간과 의도적으로 만든 자투리 시간에 마음껏 노트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글도 그 노트에 기록하면서 쓰고 있다.
나의 딴짓 노트들. 맨 오른쪽은 처음 만든 촌스런 은색 카드링을 채운 노트. 높이가 5m 정도 되는 거대한 그림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볼 수 있다.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둘수록 시야가 넓어지면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카드링'이라는 부분이 아닌 '펼쳐지지 않음'이란 전체를 보려면 거대한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때와 같은 거리감각이 필요하다. 그 거리 감각을 가지는 데에 제로베이스 사고가 딱이라고 생각한다. 카드링에만 집중되어 있는 초점을 거두고 나니 원점에서의 시각으로 볼 수 있었고 펀칭 위치라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전 글들에서는 망상활성계의 장점만 이야기했었는데, 단점도 있다. 이 제로베이스 사고를 방해했다. 카드링이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망상활성계는 카드링 외에 다른 정보는 문제의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고 걸러내 버렸다. 오직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만 끌어들이는 망상활성계가 카드링 외에 다른 정보는 모두 걸러내 버리고 카드링에만 초점을 맞추게 하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망상활성계는 잘 사용하면 천금 같은 정보와 기회 그리고 아이디어를 얻게 하지만, 잘 못 사용하면 틀에 갇힌 생각으로 진짜 중요한 걸 보지 못하게 한다. 내 생각이 망상활성계를 결정한다. 어떤 정보를 보게 하고 어떤 정보를 보지 못하게 할지는 내 생각에 달려 있다. 그래서 결국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중요하다.
망상활성계가 어떤 정보를 취사선택할지는 바로 나의 생각에 달려 있다.
사람은 온종일 그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람은 생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 -잠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얼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하루종일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에머슨-
머릿속에 그 생각만 가득한 사람은
틈만 나면 그 짓을 하려 한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가득 채우냐에 따라
틈만 나면 하게 되는 그 짓이 달라진다.
그리고 매우 당연한 확률로
그 짓이 어떤 짓이냐에 따라 나의 삶이 달라진다.
-이전 글 '망상활성계의 초능력'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