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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텍스트셀러 밍뮤즈 May 05. 2020

그녀의 레드립이 나를 바꿨다

그녀의 레드립이 나를 바꿨다



본격적으로 화장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나의 화장은 무지개였다.



눈은 파랗고 볼도 빨갛고 입술도 빨갛고.

지금처럼 유튜브로 배울수도 없는 시절이니 그냥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며 대충 칠했던것 같다.

미술 잘하는 친구들은 화장도 참 잘하던데 나는 아니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아직도 이불킥을 한참 하고도 남을 정도니까.



그나마 화장다운 화장을 한것은 대학을 몇년 다니면서 메이크업 스킬이 상승했을 무렵이다.

휴학도 하고 학교를 오래 다니면서 슬슬 화장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참 부지런하고 과했다.

마스카라, 아이라이너, 립스틱 없으면 화장 아닌줄 알았으니까.

색깔만 빠졌을뿐 여전히 나의 화장은 '과장'이었던 것이다.

눈은 더 크게! 입술은 또렷하게! 얼굴은 하~~얗게!



이런 과장화장을 즐겨했던 나도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메이크업 암흑기를 맞이했다. 

첫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하다.

밖에 예쁘게 하고 돌아다닐 일도 별로 없었고, 전처럼 화장을 안했다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화장품들은 유통기한을 넘긴채 고이고이 잠들어있었다.

새빨간 레드립 그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던 그 엄마는 무려 아들 셋을 키웠다.

그 당시 나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 스타일이었다.

즉 편한 티셔츠에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 신고 애 잡으러 뛰어다니는 전형적인 엄마 말이다.



하지만 애가 셋인 그 엄마는 첫인상부터 무척 화려했다.

긴 머리를 깔끔하게 올백해서 묶고 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엄마의 새빨간 레드립.




멀리서보면 입술만 보일 정도로 새~~ 빨간 레드립을 바른 그 엄마와 인사 할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술부터 시선이 갔다.

처음에는 쥐잡아 먹었어? 왜 이리 빨개. 하며 못마땅해 했던것 같다.

하지만 자주 마주칠수록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 엄마와 레드립은 뭔가 

'엄마인데도 불구하고 생기 넘치며 자기를 관리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은 영 별로다. 

그래도 애낳기 전에는 괜찮단 말도 들었는데 이젠 아니네...

잠깐 우울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립스틱을 꺼내들었다.




나도... 그 엄마처럼 립스틱을 다시 발라볼까?


선물받았지만 과감한 컬러탓에 감히 쓸 생각도 안했던 새빨간 레드 립스틱이었다. 

나름 어려운 결심을 하고 다음날 등원길에 발라보았다.



기왕이면 대범하게 지르자 생각해서 입술선을 따라 꽈악 풀립으로 채워 발랐다. 

마치 90년대 김혜수 화장처럼.

그리고 거울을 보자 한층 생기가 도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날 이후로 레드립은 내 메이크업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요소다.

피부화장을 하고 아무것도 안해도 꼭 입술을 레드로 마무리 해준다.





처음엔 쥐잡아 먹었냐며 온갖 반응들이 왔지만 이제는 다들 익숙해져서 오히려 안바르면 걱정한다.

어디 아프냐고.

내 입술의 레드컬러는 레드카드처럼 경고의 의미가 아니라

나 건강하고 잘지내고 있다고 말해주는 건강한 레드랄까?




문득 지금은 얼굴을 잘 보지 못하는 레드립 그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립스틱 하나로 자존감을 찾아준 그녀. 여전히 레드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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