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친화적 환경에서 술 끊어보기
나는 솔직히 '술꾼'이었다.
글쎄 술꾼의 기준을 어떻게 잡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긴 하다. 누구는 소주 5명 넘게 마셔도 끄떡 없는 사람이 술꾼일거고 누구는 맛있는 음식을 보면 안주라며 술을 떠올리는 이를 술꾼이라 할 거고. 그렇다면 나는 후자의 술꾼이었다. 술을 끊은 지금도 사실 맛있는걸 보면 어울리는 술이 떠오른다.
사실 내가 이렇게 술꾼인 이유 중 하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알콜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빠는 지금도 내가 친정에 놀러가면 반주를 드신다. 엄마도 술을 못드시는 편이 아니고, 가족들 모두 술을 꽤 마시는 편이다. 그리고 나와 신랑은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눈이 맞았다. 술을 마시며 연애를 했고, 지금도 아이들 재우고 마시는 한 잔을 낙으로 여긴다.
본격적으로 술을 처음 마셔본 기억은 어이없게도 고3 여름쯤. 수능 공부한다고 독서실로 가 챙겨간 사복을 갈아입고 술 먹으러 놀러가던 참으로 철없던 시절...
1살 위였던, 친구나 다름없지만 오빠는 오빠였던 이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처음 마셔본 소주는 생각보다 달았다. 내가 어렸기에 달았고, 몰래 마셨으니까 달았겠지. 하여튼!
이후로 당연히 수능을 망쳤지만 재수좋게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이제 '자유롭게 대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 옆에는 강남시장이라는 이름의, 하지만 절대 강남이 아니었던 그 곳. 학교 바로 옆에 포장마차 밀집구역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희한한 구조인데 포장마차긴 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신림 순대촌 같은 구조라고 해야 할것 같다. 다 무너져 가는 2층짜리 상가 1층에 벽이 없이 포장마차가 우루루 붙어있는 구조.
재료를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술자리 바로 옆을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오티니까 한 잔, 과 동기니까 한 잔, 좋아하는 선배 따라 한 잔, 시험 끝나서 한 잔, 축제 끝나고 한 잔, 우울하니까 한 잔, 남친 생겨서 한 잔.... 모이면 수 천 잔쯤 되겠지? 수많은 잔을 부딪히며 알콜로 가득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취업한 후 펼쳐진 회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남들 다 가기 싫어하는 외식도 난 공짜로 술을 마시니까 좋아했고 잘 마시니까 상사들도 날 좋게 봐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 생활이 좀 힘들때도 술로 잊곤 했다.
이렇듯 누가봐도 술꾼이었던 나는 약 2달 전부터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건강이 갑자기 나빠진 것도 아니고, 임신을 한 것도 아니다. 최근 바뀐 나의 생활이 '술을 마시며 생기는 여러가지 문제점'들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자 많은 일들을 만들었다. 성격 급한 나는 시간계획표를 짜서라도 하나하나 다 겪어보고, 실패하더라도 더 낫게 보완하고 될 때까지 해보자며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많이 마시면 판단이 흐려져 나도 모르게 쓸데 없는 곳에 돈을 쓰고 (돈 벌자고 하는거지 낭비하자고 노력하는거 아닌데) 나이가 들었는지 다음날 컨디션이 엉망이 되버려 계획한 일을 할 수 없고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기분이 다운이 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바로 신랑에게 시비를 거는 새로운 주사였다. 다음날 일어나 이불을 걷어차며 어제 왜 그랬지 하면서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도, 그리고 신랑이 알았다며 받아줘도 내가 한 짓에 대한 후회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쓰다보니 어쩐지 반성문 같지만... 꽤나 구구절절 하지만 바뀐 내 생활이 알콜과 어울리지 않는 것. 바로 이런 이유가 내가 술을 끊은 이유이다.
사실 술 하나 끊는다고 인생이 180도 달라질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달고 살았던,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단호하게 끊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장미빛 미래를 꿈꾸기만 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았던 내 인생.
이것저것 끊고 내 의지로 조절하다 보면 그래도 미니멀하고 명료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