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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씨 Apr 07. 2022

나와 글 _ 말만 작가고, 시다바리

3인칭 회고록 06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의 한 건물. 5층이었나 그쯤에 위치했던 사무실에서 J의 구성작가의 일이 시작되었다. O스타일이라는 뷰티, 패션 채널의 한 다큐를 담당했던 그녀는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섭외 전화나 이메일을 돌리는 일을 주로 했다. 아니면 촬영해 온 영상에서 들리는 모든 말소리를 적는, 일명 프리뷰 일을 하는것이 주업무였다. 오래된 건물 한쪽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해외에 여행을 다녀온 모 연예인의 말을 토씨 하나 안틀리고 적고 있을때면 부럽기도 하고, 말을 이상하게 해서 짜증이 나기도 하고, 얘(?)는 여행 다녀오고 돈도 버는데 나는 이 어두침침한 사무실 한구석에서 뭐하고 있나 현타가 오기도 했다.



기분 전환 할 겸 탕비실로 향하던 J는 한참 수다를 떨던 피디들이 그녀의 기척에 말이 뚝 끊기는것을 느꼈다. 패션 프로그램 특성상 피디도 모두 여자였는데 툭하면 작가들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들이었다. 이미 그런걸 알고 있던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커피를 리필했다. 등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그 곳을 빠져나오자 다시 웅성거리며 뒷담화가 시작되었다. '아... 할 일 참 드럽게 없나 보네.'



사실 이 정도면 아주 가벼운 수준의 피곤함이었다. 피디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할 정도였는데, 같이 일하는 작가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훨씬 피곤해졌다. 모든 작가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일하다가 갑자기 잠적해 버리거나 연락을 끊고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온전히 그 일을 모두 떠맡는건 J를 비롯한 다른 작가들의 몫이었고, 상대적으로 연차가 적은 J가 맡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편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부조리한 일들을 고발하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일한적도 있는데, 당연히 섭외는 작가의 몫이니 인터뷰나 촬영할 업체에 J 연락처가 노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편집 과정에서 일반 인터뷰로 진행했던 업체를 까게 되는 방향으로 틀어지면, 비난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 됐다. 당장 고소하겠다는 말은 예사로 듣고, 가만 안두겠다는 온갖 협박을 1차로 당하는 것은 바로 J였다. 나이가  지금이야 그건 저한테 하실 말이 아니죠, 저는 해야할 을 한것 뿐인데요. 자꾸 그러시면 맞고소하겠다 이런식으로 대응할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20대였다. 멘탈이 강하지 않았던  시절 J 자신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협박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꾹꾹 마음 속에 눌러 담았다. 원래 방송 일이 그렇지 하는 자조 섞인 이상한 결론과 함께.



나이는 많은데 연차는 적었던, 일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구성작가 J. 그녀는 유난히 날씨가 좋던 어느 날, 출연료는 언제 주냐며 일방적으로 해대는 쌍욕을 들으며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근본없고 싸가지 없으며 또라이 같은 방송계를 탈출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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