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을 준비하면서부터 이미 마음은 무거웠다. 지하철 속 사람들 틈에 끼어 서 있는 것도, 회의실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도, 단톡방에 올라오는 농담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작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업무보다 더 어려운 건 사람과의 거리였다. 상사의 말투 하나에 진심을 읽어내야 했고, 동료의 미소 뒤에 진짜 의미를 추측해야 했고, 실수를 한 날엔 아무 말 없이 퇴근하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잘하고 싶었다. 적어도 눈에 띄는 문제 없이, 그냥 무난하게 하루를 넘기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고 벅찼다.
사람들은 자꾸만 '사회성'이라는 말을 꺼낸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말끝을 맞추고, 공감의 리듬을 따라가는 능력.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건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감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단절은 관계를 낯설게 만들었고, 반복된 거절과 무시, 방임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자꾸만 불안했다. 내가 지금 한 말이 이상했을까, 방금 그 표정은 불쾌했던 걸까, 내가 너무 진지하게 굴었나.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질문이 이어졌고, 그 모든 질문은 하나의 확신으로 돌아왔다. 나는 뭔가 어긋나 있다.
회사 생활은 그 감정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준다. 회식 자리에서 적당한 유머를 못 던진 날엔 혼자 눈치를 봤고, 팀 프로젝트에서 말을 아끼면 소외됐고, 실수 한 번에 모든 신뢰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지내자’는 말은 있었지만, 그 말 뒤에 감춰진 경계와 기대는 숨기지 못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문제아’가 아니라 ‘눈치 없는 사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뿐, 나는 또다시 그 바깥에 서 있었다.
가끔은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게 어려웠고, 고마운 마음을 말로 전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어릴 때 한 번도 그렇게 표현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늘 혼자 결정하고, 혼자 참고, 혼자 정리했기에 이제는 그게 당연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무던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냥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거다. 누구도 내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점점 무감해져 갔다.
어릴 적의 외로움은 자라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형태만 바뀔 뿐이다. 예전에는 조용한 아이였고, 지금은 어색한 어른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침묵했고, 직장에서는 피했다. 친구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못했고, 연인과는 자주 오해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나이면 이제 괜찮아야지.”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나이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까봐, 아니 이해하지 못할까봐 망설인다. 부적응자는 자라서도 계속 부적응자가 된다. 왜냐하면 한 번도 진짜로 적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