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틀을 잡은 수사학을 계승 발전시킨 로마 시대의 수사학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키케로(기원전 106-43)와 퀸틸리아누스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고전 수사학뿐 아니라 그야말로 수사학사(史)상 최고의 록스타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Ciceronian’이라는 영어 단어까지 생겼을까. 사전을 찾아보면 ‘Ciceronian’은 ‘키케로(Cicero)처럼 장중하고 단아한’, ‘키케로 같은 웅변의’, ‘키케로풍의 문장가’라는 뜻으로 풀이돼 있다.
선거 기간 동안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데 열중해온 양당의 선거 캠프는 “부시야말로 토론의 대가”라든가 “케리는 로마의 키케로를 능가하는 웅변가”라며 상대 후보의 토론 경쟁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울신문 2004년 10월1일자)
많은 정치 전문가들이 '현대의 키케로'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최고의 연설가 중 한 명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조선일보 2019년 5월24일자)
위 신문 기사에서 보듯이 키케로는 명연설가의 대명사로서, 대중들도 수사학은 모르더라도 키케로는 알 정도이다. 알다시피 8, 90년대까지만 해도 웅변학원이 적지 않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웅변은 테권도, 주산 등과 더불어 주요 청소년 교육 중의 하나였고(아마도 서구의 수사학 교육 전통이 한국에 이식된 것이 아닐까) “이 연사 ~~라고 외칩니다!”라는 클리셰로 잘 알려진 웅변대회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집정관으로 정치인이자 변호사, 웅변가이자 라틴어 작가, 수사학자(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리도 다재다능할까?)인 키케로는 ‘웅변가’(Orator), ‘발상에 대하여’(De Inventione) 등의 수사학 책을 집필했고 중세와 르네상스에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작자 미상의 수사학 서적인 ‘헤레니우스를 위한 수사학’(Rhetorica ad Herennium)의 유력한 저자로 여겨졌다.
위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체사레 마카리(Cesare Maccari)가 1888년에 그린 유명한 그림 ‘카탈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Cicero Denounces Catiline)이다.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학자로 불리는 메리 비어드가 쓴 베스트셀러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원제 SPQR: SENATUS POPULUSQUE ROMANUS: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첫 장을 장식하는 사건이 바로 이 그림의 배경이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그림 왼쪽 서서 연설하는 이) 원로원에서 ‘카틸리나 탄핵’을 부르짖으며 연설한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아프리카 총독을 지낸 카틸리나(Catilina. 화면 오른쪽 쭈그려 앉은 이)는 집정관 선거에서 키케로에 패하자 쿠데타를 도모하고, 이를 알아낸 키케로는 네 번에 걸친 원로원 연설을 통해 카틸리나 세력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지켜낸다. “카틸리나여, 그대는 언제까지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레토릭으로 시작하는 당시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수사학자로서 키케로는 좋은 수사학 담화는 청중을 가르치고, 감동을 주고, 즐겁게 하는 것(ut doceat, moveat, delectet)이라고 했다.
교황이 로마에서 수사학 교수직을 제공하기까지 한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35~96년)는 교육자로서 은퇴한 뒤 키케로를 계승하며 12권으로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수사학 저작 ‘변론법 수업’(institutio oratoria)을 내놓는다. 단편적으로 전하던 이 책은 1416년 한 수도원에서 완성본이 발견된 뒤 1475년부터 1600년 사이에 100판 이상이 출판될 정도로 유럽 교육계에서 핵심 교과서 역할을 했다.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를 거치며 수사학의 5가지 규범(canon)이 분류되었다. ‘착상-배열-표현-기억-발표’가 바로 그것으로, 소재와 논점을 어떻게 정하고, 내용은 어떻게 분류하고 구성하며, 어떤 언어와 수사법으로 표현해서, 기억하고 발표하는지 수사학의 AtoZ를 정리한 것이다.
한편 키케로는 카이사르 사후 혼란한 로마 정정(政精)에서 공화정 회복을 꿈꾸며 권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 연설을 펼치다 암살된다. 그의 잘린 머리는 안토니우스의 저녁 식사 자리로 보내졌는데,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머리에서 헤어핀을 뽑아 키케로의 혀에 찔러 넣었다고 전해진다. BC 31년, 케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뒤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면서 독재자가 됐다. 바야흐로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고전 수사학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가 만들어놓은 수사학의 체계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