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의 역사4

중세와 르네상스의 수사학

by Editor M

중세에는 수사학이 문법, 논리학과 더불어 3학(三學, trivium)으로 불렸다. 여기에 음악, 산술, 기하, 천문학 4학(四學, quadrivium)을 더해 자유과목(artes liberales, liberal arts)을 구성했다. 각각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인 셈이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으뜸은 사랑이듯, 문법과 수사학과 논리학(변증학) 중에 으뜸은 논리학이었다. 이견이 없지는 않지만, 중세에 수사학은 실천적 학문에서 지식과 문학적 기술의 영역으로 축소됐다. 또한, 다소 박제된 느낌의 학문으로서 학교 교육적 가치만 비대해졌다는 일반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중세에 ‘수사학 혁명’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편집, 취합, 발췌 과정을 통해 부적절한 내용을 걸러내 고전 이론을 당시의 목적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말뜻 자체가 부활, 재생을 가리키듯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교육이 중요했고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가 가장 영향력 있는 수사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쓴 수사학 교과서 ‘두 배로 풍성한 단어와 사물의 어휘에 관해’(De Duplici Copia Verborum ac Rerum)는 150판이나 출간됐다고 전해지는데, 제1권 33장에는 “Tuae literae me magnopere delectaurant”(당신의 편지가 나를 매우 기쁘게 했소)라는 문장의 150가지 변형과 “Semper dum vivam tui meminero”(살아있는 동안 늘 그대를 기억하겠소) 라는 문장의 200가지 변형을 실려 있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가 요즘보다 훨씬 더 레토릭과 문채(文彩)의 조탁을 중요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즈음 수사학 연구에 있어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프랑스 수사학자 피터 라무스(Peter Ramus)는 전통적으로 수사학에 속해있던 변증술, 즉 논리학을 수사학에서 분리하였다. 고전수사학에서 착상(inventio)과 배열(dispositio)은 논리학에 맡기고, 양식(elocutio)과 전달(pronuntiatio)만 수사학이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전 수사학의 4번째 규범인 기억(memoria)는 아예 빠졌다. 사실 수사학의 역사에서 논증과 내용이 중요하냐, 표현과 양식이 중요하냐는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온 이슈이다. 하지만 이는 시대정신에 따라 더 중점을 두거나 활용한 분야가 있을 따름이지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르네상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라무스에 동의하며 ‘학문의 진보’에 아래와 같이 써서 르네상스 시기의 키케로학파가 실체(res)보다 말(Verba)을 중요시한다며 비판했다.


“사람들은 내용보다 말을 더 좇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용의 무게, 주제의 가치, 논증의 건전함, 착상의 생명. 또는 판단의 깊이보다 문구의 고급스러움, 원만하고 깔끔한 작문, 절의 향기로운 하락, 다양한 전의와 비유의 예증 등을 더 좇기 시작한 것이다” (『한권수사학』에서 재인용 p604)


keyword
이전 04화수사학의 역사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