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릭의 법칙3-2

수사학의 5대 규범: 배열

by Editor M

2단계는 ‘배열’ 또는 ‘배치’이다. ‘배열’(dispositio, arrangement)은 오래전부터 국어 시간에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수사학인지도 모른 채 자연법칙처럼 암기하고 있는 수사법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모든 논문도 이 형식을 취하고 있거니와, 우리는 모름지기 글이란 당연히 서론, 본론, 결론 순으로 전개돼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글을 설득하기 좋은 순서대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것이 바로 수사학의 5대 규범 중 ‘배열’이라고 한다.


퀸틸리아누스는 “조각상의 팔다리를 다 주조했다 해도 서로 연결해야만 온전한 조각상이 되며 몸의 특정 부위를 옮기거나 바꿔놓으면 아무리 모든 부위가 있더라도 괴물이 되지 않겠는가”라며 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의 필수적인 구성 부분은 논제 제시와 설득(논증) 두 가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확대한다면 도입부와 맺음말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이후 다른 수사학 이론에서 추가되는) ‘반론’과 ‘쟁점 비교’는 설득의 일부라고 하였다. 수백 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했던 로마 수사학 교재인 ‘헤레니우스를 위한 수사학’(Rhetorica ad Herennium)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① 서론(exordium) ② 사건 진술(narratio) ③ 논점 정리, 사건 분류(divisio) ④ 논증(confirmatio) ⑤ 반론에 대한 논박(confutatio) ⑥ 결론(peroratio). 하지만 많은 수사학자들은 ②와 ③을 합쳐 다섯 부분으로 나누기도 한다. 서론을 뜻하는 라틴어 exordium은 ‘(씨줄을 늘리거나 날줄을 놓음으로써) 그물망을 시작하며’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론 없이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가면 청중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함을 느끼게 된다. 서론에서는 청중들의 호감을 사고, 호기심을 자극해 앞으로 펼쳐질 논제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고, 화자가 연설할만한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에토스’가 주된 수사술로 쓰인다는 뜻이다.


2021년 6월 이준석의 국민의힘 대표의 당대표 수락 연설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넘어가자. 당시 보수 매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이 ‘이준석 현상’을 특정 정당의 변화가 아닌 시대적 현상으로 주목했다. 이 연설의 서문이다.


감사합니다, 또 감사합니다. 우선 훌륭한 선배님들과 함께 이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어서 행복했고 영광이었습니다. 나경원, 조경태, 주호영, 홍문표 후보님께 모두 감사 올립니다. “여러분은” 저를 당 대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에 힘을 주어 읽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와 함께 이 역사에 발을 들여놓으셨고, 우리가 지금부터 만들어나가는 역사 속에 여러분의 지분이 있습니다.


이준석은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경선 기간 험한 수사를 동원해 서로 치고받았던 나경원, 주효영 등 당 중진 의원들을 “훌륭한 선배님”이라 칭하며 자신을 바짝 낮췄다.(에토스) 그리고 “여러분” 즉 당원들이 자신을 당 대표로 만들어줬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역시 겸양법과 반복법을 활용해 청중들의 마음을 산다.(이 연설에서 기본적으로 설정된 청중은 당원이다)

이어서 나오는 문장이 서론의 핵심 부분이다. 대구법을 써서, 함께 역사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하면서 ‘저->여러분-> 우리’로 확대되는 점층법으로 자신을 낮춤과 동시에 확장하는 영리한 레토릭을 구사한다. 새 시대의 리더를 자처한 그가 연설의 서론에서 2,50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수사학을 고전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직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서문에서는 에토스적 호소, 논증에서는 로고스적 호소, 결론에서는 파토스적 호소가 많이 쓰이게 마련이다. 물론 이런 틀은 너무 기계적이고, 글자 그대로 ‘틀에 박힌’ 순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떤 경우에서든 이런 배열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부분이 빠질 수도 있고 어떤 장르의 연설이냐에 따라 화자와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순서를 바꿀 수도 있다. 다만 원칙이 있어야 변칙이 있듯이 이런 순서를 숙지한다면 상황에 맞추어 응용이 쉬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발언하는 연설가는 자신이 준비한 증거를 제시하고 난 후에 상대방이 제시할 것 같은 증거를 내놓고 반박해야 하지만, 상대방이 제시할 증거가 많아 보이면 상대방이 제시할 것으로 보이는 증거를 먼저 다룬 후에 자신이 준비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나중에 발언하는 연설가는 먼저 반론과 논증으로 상대방이 제시한 증거들을 반박하고 난 후에 자신이 준비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 대해 이미 나쁜 편견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사학을 정초한 아리스토텔레스도 ‘배열’에서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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