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의 5대 규범: 착상-배열-양식-기억-발표
(3)수사학의 5대 규범 - 착상
수사학의 5대 규범은 무엇을 주장해서 청중을 설득하려고 할 때, 어떻게 생각을 시작해서 그 생각을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적절한 어휘와 수사법으로 표현한 뒤에 이를 기억해서 발표하기까지를 5단계로 나눈 것이다. 이 5단계는 보통 순서대로 ‘착상’(inventio, invention/discovery), ‘배열’(dispositio, arrangement), ‘양식’(elocutio, style), ‘기억’(memoria, memory), ‘발표’(pronuntiatio, delivery)라고 불린다.
1단계인 ‘착상’은 논제를 발견하고 설정하는 단계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어떤 설득 수단(파토스, 에토스, 로고스)을 사용할 것인지 상황에 맞게 검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외토픽’(주로 외국에서 일어난 가벼운 화제를 다루는 뉴스)이란 단어로 친숙한 ‘토픽’(topic)은 수사학에서 어떤 논제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를 논증하기에 유리한 근거를 찾는 착상의 아카이브 또는 말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어떤 연설이나 글을 시작할 때 자신이 다루려고 논제의 정의(定義)가 무엇인지부터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도 어원부터 따져 수사학의 정의를 내리면서 출발했다. 어떤 말의 어원을 따지거나 정의를 내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설득이다. 여기서 ‘정의’(定義)가 하나의 토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원래 이런 말에서 나왔습니다’, ‘사전에는 이 말이 이런 뜻이라고 나와 있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바를 ‘정의’라는 토픽을 빌어 펼쳐나가는 것이다. 이 밖에도 ‘비교’, ‘관계’(원인과 결과), ‘증언’(통계, 금언) 등이 청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꺼내쓸 수 있는 토픽이다. 다시 말해 토픽이란 청자를 설득하기 위해 패턴화돼있는 레토릭의 생각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수사학은 반드시 참인 명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찬성과 반대 모두가 가능한 영역을 다룬다는 점이다. 화자나 연설가에게 유리한 주장을 찾고 청중을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의견이 엇갈리는 두 화자가 ‘정의’라는 같은 토픽을 사용하더라도 상대방의 논제를 반박하려 한다면 상대와는 다르게 논제를 정의 내리면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사학 자체는 특정 학문이나 주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논제든 다룰 수 있고, 또 어떤 논제든 다양한 방식으로(파토스, 에토스, 로고스) 접근할 수 있고, 어떤 방식이든 다양한 토픽을 사용해서 다룰 수 있는 설득의 예술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철학을 공부하라고 설득할 때 ‘가치 있는 것’이라는 토픽에 의지할 수도 있고(철학은 실용적인 결과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인간의 사고를 고양하고 인간다운 깊은 사고를 하는 행위이므로) ‘유익한 것’이라는 토픽에 의지할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야마구치 슈 지음, 다산초당, 2019)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바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토픽에 기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토픽을 활용해야 할까? 그것은 청중이 누구인지에 따라 다르다. 논제, 논거, 토픽이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연설(글, 방송)의 청중(독자, 시청자)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쓰는 토픽은 달라진다. 많은 수사학 책들이 ‘착상’의 항목에서 파토스와 에토스를 다루는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청년기와 노년기, 장년기 청중들의 특성을 나누어 기술해놓았다. 심지어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인지 금수저 출신인지까지 따져 특성을 설명했다. “수사학” 제2권 15장에 따르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은 명예욕이 강하다고 하였다. 청중의 특성에 맞게 토픽을 찾고 논증 방법을 찾고 설득의 요소를 고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람 중에는 대체로 그런 자들이 없고, 대부분은 형편없는 자들이라 하였다)
올리비에 르불은 논증으로부터 심리분석에 이르는 착상의 영역은 인간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광대하며 수사학은 모름지기 인간학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토픽에는 기술내적 토픽과 기술외적 토픽이 있다. 기술외적 토픽은 본래 레토릭의 영역은 아니지만, 청중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사법적 수사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법률(판례), 증언, 계약, 고문(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것인데 지금의 시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등이 있다.
기술내적 토픽에는 일반적인 토픽과 특수한 토픽이 있는데 특수한 토픽은 사법적 수사학 등 특정 장르의 연설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들이고, 일반적인 토픽은 ‘가능성의 토픽’처럼-그는 아버지도 때린 자인데, 이웃을 때리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장르의 수사학에서 사용 가능한 토픽이다.
그런데 이렇게 패턴화된 착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포함해서 좋은 착상이란 무엇일까. 어찌 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설득력 있는 착상의 토픽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프레임의 착상일 것이다. ‘수사학 기술의 요소들’(The Elements of the Art of Rhetoric)을 쓴 19세기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헨리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낯익은 동시에 폭넓고 포괄적인 주제가 선택될 때마다... 오직 일반적인, 낯익은 견해들만 취해질 수 있고, 착상의 삶이 없다. 그것은 죽은 생각을 상기하는, 기억의 차갑고 생기 없는 작업이다. 영감도 없고 만족도 없다. 따라서 무엇인가 독창적인 새로운 견해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착상의 작업은 반드시 힘들고 무거울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