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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문의 흰 집

by 김지숙

붉은 문의 흰 집


뼈대도 없는 늙은 집은 붉은 문의 흰 집으로 개축 중이고


시인은 먼 이국에서 시처럼 죽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세상이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시


너도 이미 쓸쓸하게 죽은 사람, 시의 첫 문장처럼 밀려오는


흰 조개껍데기 하나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의 푸른 웃음이거나

무언가 알아버린 사람이 넘어간다는 슬픔의 바다 파도 소리 배어있는

안개의

거긴 늘 먼 곳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온통 겨울밤 발자국도 없이 도착한 붉은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 너를 증오해... 라고 적혀 있는, 말줄임 점이 끝없이 눈으로 내리는

시의 마지막 문장 같기도, 그 문장을 읽던 너의 목소리 같기도


너의 날숨이 나의 들숨으로 나에게

나의 날숨이 너의 들숨으로 너에게

네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송이가 살에 닿을 때마다 발갛게 아픈데도 눈을 뜰 수가 없는


너 없이도 살아, 나는 그만 아주 늙어버리고 저녁은 빵 한 조각으로 족하고 빵의 의미는 융화에 있다고 하는데 말린 무화과 맛이 희미한 마른 빵을 조금씩 찢을 때

창에 어른대는 저 몇 겹의 얼굴은 누구의 시간일까


붉은 문의 흰 집은 어둠으로 저물고


‘당신 보고 싶다’ 마지막 인사를 문에 걸어두고 시인은 물결이거나 바람이거나 흰 집의 뒤뜰을 넓혀갈 테고


너의 숨에 볼 부비는 꽃잎이거나 녹슬어가는 못이거나 네가 켜켜이 쌓여 나는 돌멩이이거나

바스락!

소리 하나를 가까스로 붙잡고 웃어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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