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하고 탁한 감정 뱉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내가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심심함'이었다. 퇴사하고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 이곳저곳 모임에 기웃대다가 우연히 글 쓰는 모임에 참석하여 첫 소설을 썼었다. 당시 모임에서 반드시 '소설'을 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설'을 택한 이유가 참 찌질했다. 당시 나는 남자 친구에게 차였고, 차인 상처와 헤어진 슬픔에 꽤나 힘들어했었다. 슬픔은 고이고 고여 점차 썩은 물이 되어갔고, 당장 썩은 물을 버리지 않으면 다른 감정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 수필로 '이거 내 이야기입니다!'라고 외칠 용기가 없어, 허구인 '소설'의 도움을 받아 썩은 물을 완전히 비우려 했다.
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소설'이란 탈을 쓰니 찌질하고 부끄럽고 탁한 감정을 마음껏 쏟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감정을 솔직하게 쓰니, 썩은 물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게 내 첫 소설의 주인공은 찌질한 여자가 되었다.
내 첫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르게 다른 사람이 쓴 주인공은 참 밝다. 첫 소설 쓸 당시 내 감정이 밝았다면,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천성이 밝고 어떤 갈등을 생겨도 항상 밝은, 이런 주인공을 묘사한 작가(또는 예비 작가님)를 보면 작가(또는 예비 작가님)도 참 밝다.
밝은 사람이 쓴 밝은 글을 보면서 새삼 찌잘한 감정을 쏟아낸 글이 부끄럽고, 이런 글을 쓴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괜히 고민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고민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항상 밝은 글을 쓰는 작가(또는 예비 작가님) 역시 고민이 있었다.
"인물 성격이 항상 같아요."
"인물의 매력이 안 느껴져요."
"진지하게 쓰고 싶은데 잘 안돼요."
그들은 일관된 인물 성격에 어떡하면 변화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고민의 답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다른 성격으로 쓰면 되지 않나?"이다. 1+1 만큼 답을 도출하기 쉬운 고민이다. 하지만 이런 쉬운 답과 달리, 손은 의도에서 벗어난 글만 쓴다.
기존에 썼던 인물과 다른 성격인 인물을 쓰는 것. 왜 안 되는 걸까?
사람은 수십 가지 감정을 느낀다.
분노, 슬픔, 욕망, 미움, 절망, 짜증, 원망, 행복, 사랑, 불쾌, 질투, 혐오, 공포, 기쁨, 수치심, 죄책감, 권태, 불행, 희망, 두려움, 설렘, 걱정, 기대, 희열...
작가는 사람이니, 작가 역시나 위에 나열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한 감정을 솔직하게 뱉을 수 있을까?
밝은 인물만 쓰는 작가(또는 예비 작가님)에게 "소설 말고 일기나 낙서로 찌질한 감정을 써 본 적 있나요?"라고 물으면, "아니요,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이 답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는 것. 감정을 느끼지만 숨기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 감정을 느끼지만 혼자 이겨내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 스스로 감정을 예쁘게 포장하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감정을 어떻게 뱉어야 하는지 잊었다는 것.
사실 나 역시 감정을 포장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감정을 숨기고, 혼자 이겨내고. 그런 내가 첫 소설로 찌질한 여자를 쓴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허구라는 가면에 마음 편히 속 이야기를 맘껏 했던 게 아닐까. 운이 좋게 처음에 찌질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쓴 것이 다음 소설 쓸 때 큰 도움이 됐다. 남이 볼 때는 이상할 수 있는 인물 심리를 허구라는 가면을 쓰고 당당하게 쓸 수 있었다.
항상 밝은 주인공. 일관된 밝은 분위기인 소설. 이는 작가 스스로 찌질하고 탁한 감정 뱉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스스로 탁한 감정을 뱉는 법을 몰라서, 소설의 내용도 날 것이 아닌 예쁘게 포장되어 나오는 것이다.
항상 밝은 글을 쓰고 있다면, 일기나 낙서로 자신의 지저분한 감정을 토해보는 건 어떨까?
찌질하고 탁한 감정을 뱉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이것이 소설의 시작점 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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