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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못소 Jun 15. 2018

그.물.설. 1 빨래 건조대

에피소드 1 : 빨래 건조대 (매주 토요일 연재)




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에피소드 1. 빨래 건조대  



“이 송씨, 아까 줬던 제안서 다 읽었어?” 


옆자리에 앉은 사수의 머리가 파티션 위로 쑥 올라왔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회식을 했는데도, 사수의 얼굴을 멀쩡했다. 대학 선배들이 회식 다음 날에는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 송은 숙취가 아닌 다른 이유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어…어…네. 거의 읽었어요.” 

“거의? 다 읽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애매한 대답에 사수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남자 사원이었으면 벌써 큰 소리가 나갔을 텐데, 이 송의 순한 얼굴을 보니 큰 소리가 쏙 들어갔다.  


“아, 네. 다 읽었습니다.” 


다른 고민으로 복잡한 정신 상태였지만, 사수의 언짢은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제안서를 읽으면서도 계속 딴생각을 하느라 보는 둥 마는 둥이었지만, 이 송은 사수의 질문에 No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럼 회의실로 와.” 


통보를 하고 앞서 걸어가는 사수의 뒷모습은 죽은 사람을 마중가는 저승사자 같았다. 이 송은 제안서를 주섬주섬 챙겨 사수의 뒤를 따라갔다. 


불금에 퇴근하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야 하는데, 이 송은 그렇지 못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사수에게 제안서를 제대로 안 읽었다고 된통 깨지고, 신입이 회식 다음 날에 정신 못 차리고 있다고 또 혼나고, 오늘은 멘탈이 탈탈탈 털리는 날이었다. 그나마 다음 날이 주말인 게 유일한 위안이다. 아니었으면 이 우울한 기분이 아침까지 쭉 이어졌을 테니 말이다.  


“아휴.” 


회사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서 혼난 거에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집에 가야 한다. 욕조가 없어서 목욕은 못 하지만,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밤새 밀린 드라마를 보고, 주말에는 폐인처럼 먹고 자고를 반복하면, 월요일에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할 수 있을 거다.  


기분은 다운시키던 기억은 지우고, 주말을 알차게 폐인처럼 보낼 일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져워졌다. 문 앞에 섰을 때는 나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경쾌하게 누르고 손잡이를 돌리니, 현관등이 환한 빛이 나를 반겨 주었다. 사람의 온기는 없지만, 아늑한 방이 오늘 하루 고생한 나를 반겨주었다.  


- 이 송 왔다!  

- 이 송 왔어? 

- 왜 이렇게 늦게 와! 


혼자 사는 집에서 왜 다른 말소리가 들리지?  


- 이 송, 내 이름은 뭐야?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지만, 다리를 간질거리는 종이의 촉감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려 버렸다.  


발 주변에는 벽에 꽂혀 있어야 하는 종이들이 서 있었다. 어제 ‘야’ 말고 ‘이 송’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까먹지 않고 따박따박 ‘이 송’을 붙여서 말하고 있었다.  


아래서 조잘거리고 있는 그림을 보니, 깜박 있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사수의 말을 기억하고 제안서를 뚫어져라 봤을 텐데, 어젯밤부터 나를 심란하게 만든 녀석들 때문에 회사에서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오늘 스트레스의 이유가 이 녀석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저 얇은 종이를 태우거나 물에 적혀서 혼쭐을 내고 싶었다. 짧게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괴롭혔지만, 직업 그린 그림이라서 생각을 현실로 옮기지는 못했다.   


“음. 그림들아, 한 명씩 말해 줄래? 다 같이 떠드니까 누가 뭐하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 ‘이 송’처럼 이름 말이야. 우리도 이름을 갖고 싶어.  


그림의 우두머리가 [빨래 건조대]인 듯, 그가 맨 앞으로 나섰다.  


“이름인 이미 있어. 너는 ‘빨래 건조대’야.” 

- ‘빨래 건조대’? 그게 뭔데? 





이 송은 방에 들어와, 벽 한쪽에 있는 빨래 건조대를 들고 왔다. 


“빨래 건조대를 펼쳐서, 젖은 빨래를 널어. 그리고 빨래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걷어내는 거야.” 


이 송은 빨래 건조대를 펼쳐서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지금은 빨래한 게 없어서, 빨래통에 있는 수건을 물에 적혀 빨래 건조대에 올렸다.  


- 내 몸 위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올리겠다고? 나는 절대 그런 일은 안 할 거야. 




그림 [빨래 건조대]는 정색하며 빨래 건조대의 사용법을 거부했다. [빨래 건조대]는 작은 덩치인 그림보다 키가 크고, 멋진 자기 모습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다른 그림보다 에지 있고 느낌 있는 자신은 빨래를 건조하는 것보다 트렌디한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 이 송, 이 몸을 봐. 두 사선이 땅에 내려지는 게 아름답지 않아? 강하게 땅을 짚고 서서, 사선이 만나 균형을 이루는 아름다움! 그런 나에게 빨래를 널겠다고? 그건 갤러리에서 조명을 받아야 하는 그림을 갓난아기에서 색칠 놀이용으로 던져주는 것과 같은 거야.  


[빨래 건조대]의 장황한 설명을 얼빠 진채로 들었다. 그림을 그린 건 나고, 내가 이름과 정체성을 알려주었는데, 그걸 거부하는 그림이라니.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이 송, 여기서 화내면 지는 거야.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자.’ 


회사 스트레스 말고 다른 스트레스로 머리에 열이 오르고 있었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빨래 건조대]가 마음에 들 법한 사용법을 찾았다.   


“그럼 이건 어때? 갓난아기 색칠 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거야. 나도 어릴 때 빨래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그 아래에서 기차놀이하면서 놀았었어.” 




이 송은 침대에 있는 이불을 펼쳐서 빨래 건조대를 뒤덮었다. 아래 생긴 작은 터널은 어린아이가 통과하면서 놀기에 딱 좋았다.  


- 이 송, 잘 들어. 얘들이 기차놀이하면서 나를 지나가겠지? 놀이가 격해지면 나를 막 치면서 통과하겠지? 그럼 맞은 나는 엄청 아플 거야, 그렇지? 지금 나보고 몸 쓰면서 애들과 놀아주라는 거야? 


작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인데, 순간 낮에 회의실에서 혼내던 사수처럼 보였다. 살아있는 저승사자가 저런 사람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존재가 집에도 있었다.  


이 송은 말대꾸 대신 얼른 다른 사용법을 고민했다. [빨래 건조대]는 아무래도 멋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매력적이면서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빨래 건조대의 사용법이 뭐가 있을까? 


작은 방을 둘러보면 이 송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밤이 되어 어둑해지니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주변에 공원이 조성된 것이 아닌데도,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래, 액자 프레임이 너한테 딱이겠다!” 


이 송은 건조대의 양 옆의 날개를 접어 삼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창문 앞에 놓자, 건조대의 삼각형 밖에 창문 풍경이 보였다. 


“액자처럼 네 앞에 풍경이나 그림을 넣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야. 이런 건 멋지지 않아?” 



[빨래 건조대]는 날아서 이 송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빨래 건조대를 통해 보이는 풍경을 봤다. 말없이 풍경을 보고 있던 [빨래 건조대]는 이내 흡족한 듯 입을 열었다.  


- 좋아. 이제부터 내 이름은 액자 프레임으로 하겠어. 


[빨래 건조대]의 허락을 받자, 이 송도 으쓱해졌다. 그림의 품격이 올라간 만큼, 자신의 품격도 올라간 것 같았다.  

[빨래 건조대]의 이름이 정해지자, 다른 그림들도 재촉했다. 그들의 이름도 다시 정해주고 싶지만, 회사 스트레스에 [빨래 건조대]의 기분을 맞추느라 심신이 지쳤다.  

이 송은 다른 그림에게는 다음을 기약하며, 샤워하려 들어갔다.  


‘핸드폰도 챙겨야지.’ 


노래를 들으면서 샤워하는 게 힐링이지만, 지금의 목적은 달랐다. 그림들이 잠들 때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핸드폰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그림이라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이다.  

이 송은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물.설. 첫번째 


이름 : 빨래 건조대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액자 프레임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글 못 쓰는 소설가 브런치 : https://brunch.co.kr/@story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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