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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못소 Jun 22. 2018

그.물.설. 2 페브리즈

에피소드 2: 페브리즈 (매주 토요일 연재)


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에피소드 2. 페브리즈  




한가로운 주말이라 마음껏 늦잠을 잤더니,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12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자느라 아무것도 못 먹은 배는 음식을 넣어달라고 요동치고 있었지만, 집에 먹을 건 라면밖에 없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안 챙기면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귀찮아도 밖에서 든든하게 식사해야 한다. 자취 초반에는 귀찮다고 대충 과자를 먹었더니 체력이 뚝뚝 떨어져 힘들었었다. 그 뒤로는 귀찮아도 밥은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서, 자취생 치고는 밥은 잘 챙겨 먹는 편이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점을 먹으려고 나서는데 현관문에 붙은 전단지에 '00 생활용품점 NEW OPEN!’이라는 글자와 함께 오픈 기념 쿠폰이 같이 있었다. 집 근처에 생긴 큰 생활용품점은 살게 없어도 구경 가면 재밌을 것 같다. 밥만 먹으려는 계획은 밥과 아이쇼핑으로 급 수정되었다.  






익숙하게 혼밥을 하고 새로 개점한 생활용품점에 갔다. 저렴하고 다양한 물건을 보니 없던 물욕이 생겨, 집에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빨래 건조대에 옆에는 속옷 빨래집게, 양말 빨래집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어젯밤에 [빨래 건조대]는 그런 용도가 싫다며 거절했었다. [빨래 건조대]는 싫다고 했는데, 속옷 빨래집게나 양말 빨래집게도 본래 속성을 싫어할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하나 집어 들었다. 갑자기 든 호기심으로 이것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졌다. 모든 그림이 인격화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 번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어, 이 송씨 아니에요?” 


빨래집게를 바구니에 넣으며 인격화 되었을 때 어떤 성격일지 상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다가 아는 척할 사람이 없는데, 낯익은 목소리와 정확하게 호명한 이름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주말에도 A라인 스커트를 입은 이 팀장이었다. 모두에게 집에서 방금 나왔다고 홍보 중인 자기 모습과 달리 이 팀장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빈틈없이 완벽한 커리어우먼 모습이었다. 사수에게 이 팀장이 완벽주의자라고 들었지만, 주말에도 오피스 차림으로 다니는 줄은 몰랐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길거리에서 만난 상사라 당황스러움과 어색함도 있지만, 겉모습에서도 주눅이 들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인사만 하고 헤어졌으면 좋겠지만, 이 팀장은 반갑다며 선물을 사주고 싶다고, 같이 매장을 돌아다녔다.  


선물은 고맙지만 같이 다닐수록 자신의 모습이 더 부끄러웠다. 이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바로 옆에 보이는 무드등을 집어 들었다. 


매장을 나서는 이 송의 손에는 선물포장까지 예쁘게 된 무드등이 들려있었다.  


이 팀장은 이 송이 남몰래 존경하는 상사였다. 항상 완벽한 모습으로 업무를 하는 이 팀장의 모습은 어릴 때 꿈꾸던 커리어우먼 그대로였다. 외양뿐만 아니라 업무 성과도 좋아서 회사에서 유일하게 여성 팀장이었다. 


이 팀장은 신입 때부터 남달랐다고 하는데, 수시로 사수에게 혼나고 있는 자신과 여러모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워너비에게 받은 선물이니 오늘은 하루 종일 무드등을 켜둬야겠다. 밝은 대낮에 커튼을 쳐 방 안을 어둡게 만들고 무드등을 켰다. 은은한 오렌지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건 뭐야? 


[빨래 건조대]는 다른 그림의 손을 잡고 이 송에게 다가왔다. [빨래 건조대] 옆에 선 그림은 분무기를 그리다가, 책 상위에 놓인 페브리즈가 보여서 중간에 페브리즈를 수정해서 그린 그림이었다.  


“무드등이라는 건데. 이렇게 방을 비추는 거야.” 


[빨래 건조대]는 처음 보는 물건이 신기한지, 무드등을 기웃거리며 관찰했다. 곧 흥미가 사라진 듯 [페브리즈]를 앞으로 밀었다.  


-이 녀석도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고 싶대. 


[빨래 건조대]가 밀어서 억지로 앞으로 나왔지만, [페브리즈]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송은 몸을 숙여 [페브리즈]의 눈을 보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너는 페브리즈야. 섬유탈취제라고 옷에 뿌리면 불쾌한 냄새를 지워주는 거야. 멋진 일이지?” 


[페브리즈]가 이해를 못 할까 봐 일어나 시험을 보여주었다. 일부러 향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열연을 했지만, [페브리즈]는 [빨래 건조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건 침 뱉는 것 같아서 싫대. 다른 이름 줘. 


[빨래 건조대]의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페브리즈]도 겉모습을 중시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말해줄래?” 


소심해 보이는 [페브리즈]를 위해 몸을 낮춰 질문했다. [빨래 건조대]에게 귓속말만 하던 [페브리즈]는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이 송의 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빨래 건조대]처럼 남자답고 멋진 거였으면 좋겠어. 




소심한 모습만 봤을 때는 여린 여자아이인 줄 알았는데, 들리는 목소리는 굵은 남자 목소리였다. [페브리즈]는 한 문장을 말했지만, 그가 어떤 성격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송이 이 팀장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처럼, 자신과 다른 [빨래 건조대]처럼 당당하고 멋진 것이 되고 싶은 걸 것이다. 



자신은 이 팀장처럼 되려면 긴 시간이 걸리지만(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페브리즈]에게는 바로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액자 프레임처럼 멋진 용도가 어떤 것이 있을까? 


작은 원룸은 찬찬히 보며, 멋져 보이는 물건을 찾으려 애썼다. 이제 갓 회사원이 된 신입사원의 집에는 있어 보이는 인테리어 소품보다는 실용적은 물건이 다 였다. 

집에서는 찾기 힘들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려고, 스마트폰을 꺼내는데 [빨래 건조대]의 말이 귀에 꽂혔다. 


-나도 무드등처럼 빛날 수는 없나? 


[페브리즈]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보다 무드등이 더 관심이 있는 듯, 다시 한번 무드등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선 [페브리즈]도 무드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래, 무드등으로 하면 되겠다!” 


이 송은 분리수거 봉투에 넣어두었던 다 쓴 페브리즈 통을 꺼내왔다. 그리고 무드등 위에 올리니, 페브리즈 안에 전구가 있는 것처럼 빛이 났다.  


“지금은 꼬마전구가 없어서 페브리즈 안에 전구를 못 넣었지만, 꼬마전구를 넣으면 더 그럴듯한 무드등으로 보일 거야.” 


종이에 어떤 모습인지 그려서 보여주고, 인터넷에 검색해서 꼬마전구가 어떤 건지도 보여주었다.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페브리즈]는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여 좋다고 표현했다.  


-이 송, 이 꼬마전구 내 몸에도 두르면 안 돼?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빨래 건조대]는 꼬마전구를 탐냈다. 이 송은 [빨래 건조대]가 말이 안 들리는 듯 무시했다. 대신 무드등처럼 예쁘게 빛나는 [페브리즈]를 상상하며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이 송의 뒤에서 [빨래 건조대]가 계속 칭얼거렸지만, 끝내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물.설. 두 번째 

이름 : 페브리즈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무드등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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