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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Jun 01.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93 -어린이 없는 어린이날

2023년 5월 5일 금요일


 오늘은 어린이날, 엄마의 어린이들은 지금 병원에 있다.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10시 40분부터 재활치료가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기저귀부터 확인하고 동생을 씻겨주었다. 그런데 오늘 비가 와서 동생의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환자들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말해주었다. 그와 반대로 내 상태는 오늘따라 상당히 좋았다. 아무래도 스케줄이 적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보다.


 여유롭게 준비를 마쳤는데도 재활을 가야 할 시간이 한참 남았다. 문자를 보니 어제 시킨 촉감 공놀이 세트와 찰흙세트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딱 마침 어린이날에 도착했다. 동생에게 어린이날 선물이라며 보여주었더니 반응이 심드렁하다. 유튜브를 틀어줬더니 영상을 보느라 내 말에는 대꾸도 안 해준다. 옆에서 질척거리며 고무공을 손에 쥐어 주었더니 그제야 쳐다보았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조물 거리면서 공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재활을 가기 전에 기저귀를 한번 더 갈아주고 휠체어에 태웠다. 어린이날 선물이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왼손으로 꽉 쥐고 있다. 첫 시간은 내가 동생 옆에서 운동치료를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무엇을 하는 건지 몰랐는데 익숙한 도구가 눈에 띄었다. 용인에서 재활치료를 할 때 본 것과 똑같은 것이다.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단순하게 장난감 링을 옆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동생의 손을 잡고 시작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꽤나 집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트러진다. 심지어 꾀도 부렸다. 1개씩 넘기라고 했는데 2개씩 잡고 한다. 계속 똑같은 걸 하다 보니 요령을 터득했는지 이제는 링을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옮기지 않고 가운데 왔을 때쯤 그냥 떨어트렸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참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확실히 용인에서 했을 때보다 움직이는 링을 보면서 오른쪽까지 시선이 잘 따라간다. 그때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팔만 겨우 움직였었는데 지금은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게 자연스럽다. 15분 정도는 보호자가 운동치료를 해주고 나머지 15분은 치료사가 진행한다고 하여 동생을 넘겨주고 대기실로 나갔다. 동생의 작업치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나는 그림작업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재활을 들어갈 때 엄마가 도착했다. 오늘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도 우리를 보기 위해서 엄마는 비를 뚫고 왔다. 엄마가 왔으니 동생을 맡기고 나는 마음 편히 내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오전 재활밖에 없어서 점심시간 이후로는 자유시간이라서 엄마가 온 김에 동생 머리도 감겼다. 나 말고도 동생을 책임질 사람이 있어서 굉장히 편했다. 그런데 동생은 엄마가 왔는데도 피곤한 지 쳐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졸기만 했다. 결국은 동생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휠체어를 타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비가 내리는 창문 앞 앉아서 바깥 구경을 했다. 엄마는 동생이 군대에 있을 때 집으로 보낸 편지와 함께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을 가져와서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니 이 자식은 군대에 갔을 때 우리 집 고양이에게도 편지를 보내놓고 나한테는 편지 한 통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괘씸해서 나중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 편지를 꼭 받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동생이 땀을 흘리며 힘겨워했다. 휠체어에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지  병실로 가고 싶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 구경을 끝내고 병실로 돌아와 동생을 눕혀놓고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렇게 침대에 쉴 동안 엄마와 나는 복도로 나와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물론 대화는 전부 동생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병원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해주는데 그 모습이 상상이 가서 귀엽긴 했다. 작업치료를 하고 있을 때 치료사가 동생에게 장난감 링을 쥐어주었는데 그걸 자기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동생을 보고 천사 같다고 얘기를 했고 동생은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업치료가 끝나고 문 밖을 나설 때까지 머리에 링을 올려두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또 한날은 치료실에 있던 풍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 꽉 쥐고 놓칠 않아서 선물로 받아왔다고 하는데 그 풍선이 아직까지도 병실커튼에 달려있었다. 작업치료를 할 때마다 자꾸 무언가를 하나씩 가지고 나와서 오늘도 손에 쥐고 있는 고무공을 보고 멋대로 가지고 온 물건인 줄 착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치료실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안 된다며 이건 절도라고 장난스럽게 얘기했더니 억울했는지 아무 대꾸도 안 해주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동생이 귀엽다는 생각을 아예 해본 적이 없고 얄밉기만 했는데 요즘은 하는 행동이 귀엽기는 했다. 뇌수술을 한 환자들의 행동을 보면 하나같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그 표정만 살펴봐도 무해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의 귀여움도 잠시일 뿐 의식이 돌아오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지만 말이다.


 동생의 저녁을 챙겨주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인스타에 그림이 올라온 걸 보고 자기 주변에도 함께 그림을 그릴 친구가 생겨서 좋다며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 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나누며 대화를 하다 보니 머릿속에만 맴돌던 생각들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 과정을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마치 잃어버렸던 나만의 색깔을 찾은 기분이다. 나에게 이번 위기가 없었다면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미루다가 결국은 더 늦게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니 오히려 지금이 감사한 상황으로 보였다. 이걸 계기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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