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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Jun 17.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09 - 지킬 앤 하이드

2023년 5월 21일 일요일


 오늘은 오전까지만 재활이 있는 날이다. 심지어 10시 40분부터 시작이라서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항상 주말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면회를 온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쉬는 날 하루가 사라지는 기분도 들었다. 분명히 할머니는 오면 더디게 호전되는 손자를 보면서 원래 상태로 돌아올지 걱정을 할 것이고, 엄마는 또 무언가를 같이 하자며 요구를 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느라 글쓰기는 뒷전으로 밀려나 차일피일 미뤄두고 있어서 과제가 주어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늘 같은 일과라서 매번 비슷한 글을 쓰다 보니 권태감이 몰려왔다.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일기를 쓰는 걸 포기하지 않도록 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내 마음을 모르겠다. 글쓰기를 왜 시작했는지 초심을 잃어버렸다. 특히나 관심 영역이 바뀌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게 더 재밌다. 매일 기록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어서인지 마음도 가볍게 느껴졌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더 몰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분하고 지루한 병원에 있다 보면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진다.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데 행동으로 실천이 되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정상까지 몇 번이나 도달했는데 현실은 시작도 안 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여기서 무엇을 더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만 커져나간다. 그러지 않기로 했으면서 마음을 비우기로 했으면서 조급함이 몰려온다.


 동생이 호전되면 우리는 퇴원을 하고 일상생활로 나갈 것이다. 내년 2월 정도면 정확히 1년으로 퇴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 후부터는 내가 문제였다. 1년이란 공백기간 동안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사회로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내가 일하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을 하면 가슴이 갑갑해진다. 지금 이 기간을 통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그 전과 똑같이 만족하지 못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두렵다.


 마음 한편으로 갈망하면서도 하던 것을 멈추고 시작하기 무서워서 생각만 했던 것을 비로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야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 또 세상을 발견한 기분이기도 하면서 이제 막 발걸음을 떼서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도 함께 따라왔다. 새로운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엔 1년이란 시간은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러면 새로운 곳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원래 하던 것을 계속하게 될 텐데 그건 또 싫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문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변화해야 한다는 의욕과는 다르게 몸이 따라 주지를 않는다. 이렇게 나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가중하면서 마음을 옭아매는 중이다. 이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참 사람의 기질을 한 번에 바꾸기는 힘든 것 같다. 분명 모든 걸 내려놓고 즐기면서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까지 부담을 느끼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은 안 그래도 지친 몸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애꿎은 가족에게 괜히 화풀이를 한다. 할머니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이 어찌나 싫던 지 가뜩이나 밥도 잘 안 먹어서 있는 것도 버릴 판인데 직접 기른 상추를 한가득 가져온 걸 보고는 그걸 어떻게 다 먹냐고 신경질을 냈다. 그리고 전에 오리불고기를 못 먹은 게 마음에 걸렸는지 집에서 직접 볶아서 가지고 왔다. 안 가져와도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며칠 전부터 전화까지 하면서 챙겨 온다고 하길래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리 불고기까지는 이해를 했는데 먹지도 않는 상추까지 가져온 걸 보고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병실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 되지 않냐면서 나한테 나눠 주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까지 하기 싫다면서 거절했다. 결국은 할머니가 가져온 상추를 직접 나눠주었다. 나를 생각해서 챙겨 온 할머니의 마음은 알겠지만 원치도 않은 것들을 자꾸만 가져와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 와중에 엄마는 동생 목욕을 시키겠다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뜩이나 혼자 있어서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칠 것 같은데 가족들까지 와서 이것저것 요구를 하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엄마는 동생 목욕시키는 것을 정말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냐며 물었다. 아침마다 몸을 닦이는데 굳이 목욕을 시켜야 하는 거냐며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동생을 휠체어에 태웠고 할머니는 나에게 동생 목욕을 시키는 동안 가져온 오리 불고기를 꺼내서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병실에 혼자 남아서 먹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가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누군가가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몸도 마음도 예민하고 지치다 보니 그냥 전부 귀찮고 남을 생각할 여유가 사라졌다. 그런데 더 무서운 점은 감정조차도 점점 무미건조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길 바라는데 누군가가 대화를 걸면 대꾸를 해줘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부터 올라왔다. 그냥 나의 감정을 소모할 만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동생의 목욕을 끝낸 엄마와 할머니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엄마는 사용한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나에게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냐며 말을 했다. 사람이 지친 상태에서 짜증까지 나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냉소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서운해할 걸 알면서도 쌀쌀맞고 날카롭게 말이 나왔다.


“엄마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면서 왜 그걸 나한테까지 시키는데?”


 내 태도를 보고 엄마도 결국은 화가 나서 서로 짜증이 가득 섞인 상태로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신경질을 부렸고, 엄마는 할머니한테 신경질을 부렸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지쳐있었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힘겨웠다. 할머니는 신경질을 내는 모습에 서운해하면서도 동생과 나를 만나러 주말마다 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걸 알면서도 행동 하나, 말 하나를 다정하게 할 수가 없었다.


 면회실로 내려가서는 병실에 있었을 때처럼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아무래도 병실에 있다 보면 자꾸만 해야 될 것들이 눈에 보이고 시키는 게 많아져서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는데 밖으로 나오면 그냥 대화만 오고 가니깐 다투진 않았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는데 나는 아직 크려면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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