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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Jun 30.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22 - 혼자 만의 시간과 함께 하는 시간

2023년 6월 3일 토요일


 오늘은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하다가 양산과 나름 가까운 포항을 가보기로 했다.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집에서 출발하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해 보니 1시간 20분 정도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리가 멀지는 않아서 당일치기로 충분히 갈 만했다. 이왕 간 김에 경주까지 찍고 내려올까 고민했지만 나중에 시간을 보고 고민해 보기로 했다. 포항에는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가 있는데 4년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을 이제야 가게 됐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드라이브 가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서도 즐겁게 놀 수 있다. 나는 특히나 혼자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운전할 때 누군가 옆에 있으면 안전 문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불편한데 혼자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사고가 나서 다친다고 해도 나 혼자 다치는 거니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벌써부터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기분이다. 역시 여행은 차로 이동하는 그 시간이 제일 신나는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 안에서 세상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갑갑했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모든 날이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를 타고 신나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11시 조금 넘는 시간에 구룡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항구 옆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구경했다. 오전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런데 관광지라서 그런지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여행을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 가족이나 연인끼리 많이 오는 것 같다.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에는 내 또래보다는 중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친구들과 모이면 나이와는 상관없이 하는 행동이 비슷한 것 같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옹기종기 모여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걸 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와 내 친구들의 미래 같았다. 혼자 놀러 오는 건 좋은데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풍경이라도 카메라에 담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음부터는 혼자 놀러 올 때 삼각대를 필수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일본인 가옥 거리는 고즈넉했다. 골목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보였다. 역사관 담벼락에는 느린 우체통이 붙어있었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엽서를 작성하고 있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나도 예전에 가족들끼리 여행을 가면 저런 걸 꼭 했던 것 같다. 절에 방문하면 연못에 동전을 던진다거나 소원나무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걸어 붙이는 것들 말이다. 그때는 진부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지나고 보니 기억에 남아있다. 오랜만에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엽서를 적었다.


 돌계단에 앉아 어떤 말을 쓸지 고민을 하며 6개월 뒤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내려 갔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이면 2023년의 마지막 달이 된다. 12월에 우편을 받을 걸 상상해 보았다. 그때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일까. 우선 엽서에는 상황이 예전보다 좋아져서 다행이라는 말을 썼다. 그때쯤이면 동생이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갈 테니 말이다. 퇴원하는 날이 다가온다는 것도 미리 축하했다. 마지막으로는 그동안 수고했고 장하다는 말을 적었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이 세상 모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알고 있으니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느덧 구경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찾아보는데 모리국수가 유명한 것 같았지만 기본이 2인분부터라서 포기했다. 그래서 다른 걸 찾아보다 찐빵과 단팥죽 그리고 국수를 함께 파는 곳을 찾아냈다. 포항 맛집이라는 말에 기대를 하고 찾아갔는데 멀리서부터 식당 불이 꺼져있는 걸 확인하고 불길함이 밀려왔다. 식당 앞에 가니 문틈 사이로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앉아있다. 혹시 오늘 영업을 안 하냐고 물었더니 어제 제사를 지내느라 오늘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망연자실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했다. 일단 걸어온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먹고 싶은 걸 포기할 순 없어서 꿩 대신 닭으로 바로 옆집에서 파는 단팥죽과 찐빵을 샀다. 그리고 바로 다른 식당을 찾아봤다. 혹시나 모리국수 1인분만 판매하는 곳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단 한 곳도 없었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사장님께 물었더니 기본이 2인분부터라서 1인분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주차를 해놓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근처에 있는 홍게짬뽕을 먹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다 좋았는데 모리국수를 먹지 못한 건 너무나도 아쉬웠다. 요즘은 혼자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1인 식당도 많아졌지만 관광지에서는 혼자 무언가를 사 먹기엔 아쉬운 점이 많은 것 같다. 대식가라서  2인분 이상도 충분히 가능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혼자면 식당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낸다. 기분 좋게 와서 혼자라서 먹지 못했다는 서러움만 괜히  남는 것 같다.


 점심을 해결했으니 다음 목적지는 환호공원에 있는 스페이스 워크다. 친구가 추천해서 가봤는데 포항사람들이 어디 있었나 했더니 다 여기에 모여있나 보다. 마치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대기줄처럼 사람들이 일렬로 쭉 서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보고 흠칫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니 스페이스 워크에 입장하려면 1시간을 대기해야 한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깐 기다리기로 했다. 인원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 기다리는 줄은 한 발자국씩 줄어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병원에만 있다 보니 몰랐는데 요즘 햇볕은 너무 뜨거웠다. 햇볕에 노출된 부위가 가려워서 무의식 중에 긁다가 확인해 보니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상하게 따가우면서 가려웠는데 바깥을 쏘다니는 동안 피부가 익어 버렸다. 그냥 날씨가 좋다고만 생각하고 더운 건 잘 몰랐다. 만약 미친 듯이 더운 날씨였으면 그늘을 찾아다녔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명하게 경계선이 생겨버린 목부위를 보고 의도치 않게 자외선의 위력을 알게 되어서 당황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뙤약볕 아래에 오래 있어도 벌겋게 익어서 가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내 면역력이 떨어진 건지 날씨가 문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1시간을 기다려 스페이스 워크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롤러코스터처럼 한 바퀴를 도는 구간이 있었는데 그곳까지는 가지 못하게 막아놨다. 스페이스 워크는 입구에서부터 양쪽으로 길이 나눠져 있었는데 한쪽은 경사가 완만한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다른 곳은 계단의 경사가 심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처음부터 경사가 심한 곳부터 돌았다. 놀이기구를 타도 웬만하면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는 계단을 오르는데 아찔함이 느껴졌다. 심지어 사람들의 걸음과 바람의 영향으로 계단이 함께 흔들려서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뒷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여기라면 살고 싶은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존 본능이 저절로 솟아날 듯하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스페이스 워크를 한번 걷는 것을 추천한다. 무사히 살아서 나가기 위해 정신이 확 차려진다.


 스페이스 워크의 아찔함을 경험하고 영일대 해수욕장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창가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고 빈자리도 찾기가 힘들었다. 자리를 잡으려고 2층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운이 좋게도 마침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일단 자리를 잡고 1층으로 내려가서 청포도 케이크와 스무디를 시켰다. 보통은 카페 뷰가 좋으면 디저트는 별로거나 둘 다를 충족하기가 어려운데 여기는 맛과 인테리어가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혼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할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서 나왔는데 얼굴 한 번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는 할머니의 말에 화요일에 들리겠다고 답했다. 지금은 어디냐는 질문에 포항이라고 말하니깐 할머니는 혼자서 무슨 재미로 노냐면서 불쌍하다고 말하며 내려오는 길에 시간이 되면 사촌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 면회라도 가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이 시간 이후에 더 이상 일정이 없기도 하고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포항에서 출발하기 전 사촌 동생한테 전화를 해서 면회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울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촌 동생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발등 부위가 골절이 되어서 수술을 했다고 하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걸어 다녀서 안심했다. 둘째 사촌 동생과 만나고 있으니 시간 맞춰서 첫째도 병원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늦게 도착했던 터라 면회 시간이 오후 8시까지라서 20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둘째가 병실로 올라가는 걸 확인하고 첫째와 덩그러니 둘만 남았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서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 길로 첫째와 진하 해수욕장에 있는 명선도로 가서 콧바람을 쐤다.


명선도는 바다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섬이었다가 길을 연결해서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롭게 되었다. 섬 전체가 조명으로 수놓아져 있어서 아바타섬이라고도 부르는데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인 것 같다. 이렇게 사촌동생과 단둘이 뭔가를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오늘 새로운 걸 많이 하는 날인 듯하다. 그렇게 밤바다 구경을 다 끝내고 동생을 집으로 태워다 주고 집으로 갔다. 그렇게 집에 가서 하루를 마무리할 줄 알았는데 울산으로 다시 소환당했다.


 숙모는 괜찮으면 자고 가라고 했지만 주차를  때가 마땅히 없어 보이고 피곤하기도 해서 동생만 내려놓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삼촌은  시각에 우리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택시를 타고 울산으로 오는 길이라며 다시 차를 돌리라고 했다. 어떻게 울산까지 왔으면서 자기를  보고  수가 있냐며 맛있는  사주겠다는 회유와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아니라는 협박을 섞어가면서 전화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삼촌집으로 갔다.


 숙모는 내가 다시 오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맞이했다. 주차난이 심각한 곳이라서 갓길에 차를 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삼촌이 술이 가득 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함께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포항에서 가져온 식어버린 찐빵도 맛있었고, 삼촌이 타준 하이볼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시끌벅적한 이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삼촌이랑 나랑 술 마시는 사람만 떠들었지만 말이다.  뭐 결국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나의 다짐이 하루 만에 무너졌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포항에서 내려오는 길에 봤던 하늘 색도 너무 예뻤고, 밤바다 위에 뜬 달도 예뻤다. 혼자서 보는 하늘도 좋지만 누군가와 같이 보는 밤하늘의 달도 좋았다. 나는 오늘 충분히 만족스럽고 재밌는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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