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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Aug 06.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49 - 기분 좋은 날

2023년 6월 30일 금요일


오늘은 준비하고 있던 공모전 접수 마감일이다. 동생이 재활을 받는 틈을 타서 원고를 인쇄하기 위해서 주변을 검색했다. 보통은 행정센터에서도 프린트가 가능하다고 해서 가까운 곳을 들렸지만 허탕을 쳤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인쇄할 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다. 혹시나 근처에 있는 PC방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서 직접 방문했지만 프린트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막막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인쇄소를 발견하고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검색을 해서 여러 군데 전화를 걸었지만 인쇄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서 다른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잠시 주춤하더니 일단 오라고 한다. 드디어 가능한 곳을 발견해서 도보로 15분 정도에 위치한 인쇄소를 방문했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인쇄소 간판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더니 사장님이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내 나를 발견하더니 프린트가 가능한 컴퓨터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혹여나 프린터가 안될까 봐 마지막까지 가슴을 졸이며 인쇄버튼을 눌렸다. 잠깐의 정적과 함께 종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보여서 사장님을 불렀다. 여기마저 허탕을 치면 답이 없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장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을 하면서 이것저것 다시 설정을 했다. 그랬더니 미동 없던 프린트기가 작동을 시작하며 원고가 한 장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흑백 17장, 컬러 1장 총 18장이 나왔고 인쇄가 잘됐는지 확인을 했다. 사장님께 장수를 알려줬더니 잠깐 고민을 하고는 그냥 1000원만 주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가격 제시에 놀랐다. 원래는 복사를 해주는 인쇄소가 아닌 것 같지만 얼떨결에 해주고는 가격을 터무니도 없이 낮게 불러서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있는 우체국에 들렸다. 우편을 부치기 위해서 봉투 겉면에는 공모 응모작 문구를 붙이고 봉투 안에 원고 종이를 넣었다. 근처에 있던 직원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다가와서 봉투 겉면에 붙인 문구가 떨어지지 않게 테이프로 다시 한번 붙여주었다. 감사하다고 말을 하고 우편을 부쳤다. 내 손을 떠난 원고를 보면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결과까지 좋으면 더 환상적이겠지만 말이다.


 주어진 과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서 마음이 홀가분했다. 병원으로 돌아가서는 동생 점심까지 챙겨주고 나서 잠이 들었다. 어제저녁에 우리 앞자리에 있는 환자분이 자꾸만 헛소리를 해서 잠을 못 자는 바람에 피로가 누적됐다. 요즘따라 밤마다 증세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하필 가까운 자리라서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고 며칠 동안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공모전 준비로 신경을 썼더니 기력이 소진되었다.


 그래도 지친 하루 속에서 그나마의 재미거리는 저녁에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요즘따라 말을 너무 잘한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앉아서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동생이 아직까지는 어눌한 발음 때문에 긴 문장 말하기를 어려워해서 의미가 함축된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대답을 하는데 그래서 더 웃긴 것 같다. 도대체 우리는 여기서 뭘 하고 있냐며 얼른 나가자고 말하다가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우리 나이에 결혼도 안 했는데 기저귀 갈 일이 뭐가 있겠어. 너 갈아봤어?”

“아니”

“20대에 기저귀를 가는 일이 흔한 줄 알아? 그럼 나는 뭐지?”


동생은 내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외”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빵 터져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아빠는 기억나?”

“어.”

“아빠는 어디에 있어?”


 나의 질문에 하늘나라라고 대답을 할지 아니면 그냥 죽었다고 할지 동생이 어떤 대답을 할 지에 대해서 온갖 예상을 해보았다. 그런데 내 머릿속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답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


“마음속?”

“어.”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동생 입에서 나온 최선의 대답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해졌다.


“그럼 너는 아빠랑 항상 함께 하는 거네?”

“어.”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꿀게. 먹고 싶은 과일 없어?”

“없어.”


 그래도 과일 종류를 쭉 읊어댔더니 선호하는 과일은 “좋아”라고 대답을 하고, 선호하지 않는 과일은 “별로”라고 답을 해주었다.


“먹고 싶은 음료수는?”

“환타 파인애플”

“아이, 또 먹고 싶다는데 사줘야겠네. 나중에 사줄게 알겠지?”

“어.”


 이제는 말하기 연습을 시키면서 놀다가 잠이 드는 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매번 말하는 걸 들을 때면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지 상태가 좋아서 안심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조마조마했던 것만 생각하면 이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감사한 일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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