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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Jul 14.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35 - 세상이 던지는 말

2023년 6월 16일 금요일


 요즘 부쩍 동생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오른쪽 팔,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아서 실내화를 벗는데 2분 정도가 걸리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혼자 걸을 순 없었지만 치료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기도 한다. 몇 달 동안 누워있는 모습만 보다가 서있는 걸 보니 새삼스레 동생의 키가 크다는 게 실감 났다.


 여기까지 온 것도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나 치료사 선생님들을 보면 환자에게 애정을 쏟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직장으로 대하는 것보단 최선을 다해서 환자를 대한다. 항상 동생을 볼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장난을 치는 덕분에 동생도 웃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갑갑한 병원 생활에서 유쾌한 선생님들과 함께 하니 병원이 그리 따분하지만은 않았다.


 오늘은 선생님들이 종이배를 접어서 동생의 머리 위에 올려두는데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사진을 찍었다. 동생도 내심 마음에 드는지 종이배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노란 종이배가 왕관처럼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귀엽다는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특히나 1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병원을 안내해 주는 직원 아저씨가 있었는데 유독 동생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면 항상 무슨 말이든 걸어온다. 아저씨한테 직접 듣기로는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동생을 보면 과거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조현병으로 약을 먹는 중이고 예전에 머리 수술을 한 적이 있어서 인지가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생을 만날 때마다 절대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낙심하면 안 된다며 당부를 한다.


 하루하루 동생의 상태를 확인하고 좌절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데 우리를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울 때가 있는데 자꾸만 똑같은 내용을 듣고 있자면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동생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멍하니 있는데 아저씨가 너무 열정적으로 말씀하셔서 다른 환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볼 때가 한둘이 아니다. 제발 모든 말들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동생이 호전될 때마다 사람들은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면서 누나에게 잘해야겠다며 한 마디씩 덧붙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면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멋쩍은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표면치레로 하는 말이지만 옆에서 듣는 나는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굳이 따지자면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동생이 나한테 고마워할 수는 있겠지만 잘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들이 잘하란 말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내게 한 말이 아닌데도 마치 무조건 잘하라고 강요받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동생 입장이었다면 잘하려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사라질 것만 같다. 동생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마음으로 내버려 두고 싶은데 자꾸만 주위에서 잘하라는 말을 주입시킨다.


 분명 기분 나쁜 말이 아닌데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묘하다. 나는 요구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 호의를 베풀고는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이 없으니 되려 신경질을 내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잘하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희생한 대가가 겨우 이거냐는 소리를 지겹게 들었다. 부모가 이만큼 키워줬으니 부모에게 당연히 잘해야 한다는 말,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그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말들이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잘한다는 기준은 너무나도 주관적이라 상대방의 기준에 못 미치면 괜히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선은 정해져 있는데 상대방을 만족시키려면 조절을 해야 돼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니깐 말이다. 그래서 잘하라는 말이 결국은 그 사람의 요구대로 잘 따르란 말 같아서 따지지 말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자발적으로 한 일인데 동생에게 그런 부담감까지 안겨주고 싶지는 않다. 잘하지 않아도 그냥 이렇게 했다고 알아주는 걸로 충분하다.


 내가 마냥 착하고 희생적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예민한 사람이라서 내가 싫다고 느낀 말이나 행동을 상대방에게 안 하려는 것뿐이다. 여기서 동생을 돌보고 있으면 착하다는 말도 자주 듣는데 나한테 있어서는 칭찬이 아니다. 오히려 착하다고만 할 수 없는데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이질감이 든다. 보통 어른들이 말하는 착하다는 자신의 말에 거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를 때 쓰는 거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나 또한 동생에게 착하다고 할 때는 내 말을 잘 들을 때만 하는 거라서 말을 하면서도 통제도구로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보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번 꼬아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항상 통상적으로 쓰는 말에 의문을 제기할 때가 많다. 정말이지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잠깐 머물다 갈 뿐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별 말을 안 하고 듣고만 있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절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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