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일기 14 - 다짐
2023년 2월 15일 수요일
오늘부로 다짐했다. 27년 인생 중 몇 개월 동안 취업을 안 했다고 해서 인생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빠르게 가다가 넘어지는 것보단 천천히 안전하게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인생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동생친구인 승호는 동생이 걱정되었는지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 확인차 연락이 온다.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도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2주만 깨어나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며 이야기해 주었다. 간병인 문제부터 재활까지 어쩌면 일상생활을 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조용히 앉아 생각을 해봤다.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예전에 할머니의 심방세동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내가 간병을 했다. 그때는 방학이었기도 했고 일주일정도라서 할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니깐 옆에서 지켰다. 이번에도 나에게 임무가 주어진 것 같다. 집안에서 내가 가장 젊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최약체이기 때문에 잃을 게 없다. 그래서 내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일을 그만둘 수 없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간병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 누군가를 간병한다는 것은 분명 힘들다. 병원 간이침대에서 자는 것, 병간호를 하는 것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가득한 병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할 사람이 나밖에 없지 않은가.
신에게 다짐했다. 내가 간병을 할 테니 일단 동생을 빠른 시일 내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어차피 몇 개월 간 백수 인생이었는데 여기서 밑바닥이 있을까. 여기서 더 쉰다고 해서 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의 인생 계획을 재빠르게 변경하였다. 일단 간병을 하며 생각만 하고 있었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어차피 병원에서는 나갈 수도 없을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메이크업샵에 취직을 하고 메이크업 유튜브 영상을 올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병원 브이로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의 상태를 매일 기록할 겸 따분한 병원 생활을 조금 더 유쾌하게 해 볼 생각이다. 내가 가진 재능을 선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차피 병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거 그 안에서 기술 연마나 하고 있어야겠다. 이게 내 운명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난 뭐든 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니깐 말이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힘든 상황이겠지만 이겨낼 방법은 찾으면 된다. 이왕 쉬고 있는 거 휴가를 더 얻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동생이 일반병동으로 옮겨야 가능한 것들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