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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Apr 08.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39 - 일기장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어제 너무 다사다난한 일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늘 하루는 굉장히 평화로웠다.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매일 사건사고가 있겠는가. 난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시간을 만끽해야겠다. 내일 오전에는 병원에 방문하여 재활의학과에서 담당하는 병실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와야 한다.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일정이 없다. 우선 집으로 도착하니 탁상용 선풍기가 도착했다. 동생이 땀이 많고 열도 나서 선풍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역시 쿠팡 로켓배송은 빠르다. 월요일에 병원으로 갈 때 챙겨가야 하니 미리 충전부터 시켜놓았다.


 빠르면 이번주 주말부터 내가 간병을 해야 할 수도 있어서 집안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나는 김에 빨래부터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바로 포기했다. 어떤 걸 챙겨가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병원에서 얼마나 지내야 할지를 모르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 덮어두었다. 지금 영상을 만들기 위해 영상은 열심히 찍고 있는데  찍는 속도에 비해 영상 편집 실력이 영 별로다. 이러다가 폰에 저장공간만 가득 찰 판이다. 너무 일을 한꺼번에 벌여놓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볼 때인 것 같다. 그래도 찍어놓으면 기록이 되니깐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수원에서 출발했냐는 말에 이미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라고 전했다. 할머니는 지금 엄마집에 있는 것 같다. 안 봐도 뻔했다. 피곤에 찌든 엄마는 할머니랑 만나면 티격태격할 게 분명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할 거고 할머니는 뭐라도 먹으라며 옆에서 닦달을 해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가족 걱정은 이 세상에서도 으뜸일 것이다. 쉴 새 없이 손주 걱정, 자식 걱정, 남편 걱정을 한다.  


“할머니 또 엄마한테 구박받는 거 아니야?”

“그래도 어쩌겠냐. 걱정이 되는데 와 봐야지.”     

 할머니도 엄마가 자신을 귀찮아하며 짜증을 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본인이 느낄 서운한 감정보다 자식의 안위가 우선인 부모였다.


 저녁에 글을 쓰며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할머니는 엄마의 짜증에 마음이 상해서 태워준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짜증을 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엄마나 나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딸들은 엄마한테 짜증을 내고 후회를 한다. 나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기억이 안 난다면서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간병에 들어갈 내가 마음이 쓰였는지 이 말을 했다.


“이건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닌데 갑자기 생각나서 말하는 거야. 지금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생활비는 내가 줄 테니깐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마. 그리고 힘들 것 같으면 당장 이번주부터 굳이 간병을 안 해도 되니깐 고민 좀 해봐. 나중에 의식이 조금 더 회복되면 그때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더 답답해.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어제 간병인이 기저귀 가는 것 보니깐 장난 아니더라. 나는 한쪽 다리만 들어주는 것도 무거워서 힘들던데. 네가 너무 힘들 것 같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엄마랑 얘기를 나눴었다. 나는 엄마한테 2월에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땄으면 좋았을 텐데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게 후회가 되고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취업도 미루고 기약 없이 대기 중이라 차라리 간병을 빨리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생활비도 슬슬 떨어져 가고 있으니 마음이 더 심란했다. 그런데 엄마가 봤을 땐 생각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이라 나한테 간병을 맡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간병을 안 하더라도 생활비를 부담해 줄 테니 지금은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그러고선 할 말이 기억났다고 했다. 얼핏 내가 일기를 쓴다고 들었던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지 않아서 물어본다고 하였다. 그전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2월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니깐 기억이 흐릿해져서 기록을 했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조금씩 일기를 쓰고 있다는데 직접 쓰자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손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혹시나 내가 쓴다는 일기 내용이 동생에 대한 기록인지 나에게 물었다. 브런치에 글 쓰는 걸 굳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엄마한테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털어놓았다. 비밀이었지만 여기서 밝히자면 우연찮게 엄마의 일기장을 다 읽은 적이 있어서 알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 다 보게 된 적이 있다. 엄마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 글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제발 일기장은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잘 숨기길 바란다. 그런데 앞으로 엄마가 보게 될 글이 내 일기장이라니 내 사생활을 들키는 기분이랄까. 참으로 민망하다. 고민을 하다가 모든 걸 기록해 놓은 브런치 링크를 엄마에게 보냈다.


아마 내가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건 엄마의 영향일 것이다. 엄마가 예전에 글쓰기를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내 글을 읽더니 잘 썼다면서 첨삭할 부분을 보내주었다. 아무래도 수정을 몇 번 하다 보니 나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중복 문장이나, 오타가 있었다. 엄마는 친절하게 캡처까지 해서 오류인 부분은 밑줄까지 그어가며 지적해 줬다. 차라리 이게 낫다. 이래야 우리 가족답다.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 그때가 생각나서 울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너무 크나큰 오산이었다. 역시 우리 집에는 신파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 동안 우리답지 않게 너무 감성적이었다. 이제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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