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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Apr 09.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40 - 인생은 선택이다 ‘안녕, 서울’

2023년 3월 13일 월요일


 오늘은 동생의 병동 전과 문제로 재활의학과 교수님이랑 면담을 해야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맞춰 병원에는 도착했지만 서로 자기 관활이 아니라며 나를 이리저리로 보내며 한참을 세워두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전화까지 하고 온 건데도 잘못 왔다며 다른 곳을 안내하길래 지금 그곳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니 간호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선 교수님이 회진 중이셔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돌고 돌다 결국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보다 30분이 한참 지나서야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동생의 상태는 그전에 들었던 것과 같이 달리 특별한 점은 없었다. 재활의학과 교수님은 한마디로 동생이 식물인간 상태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혼미상태와 어떤 차이냐 물었더니 둘 다 똑같이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보면 된단다. 그리고 용인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2-4주 정도 재활치료를 진행하고 재활병원으로 입원 수속을 밟으면 된다고 하면서 재활 기간은 1-2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혹시 1-2년이 입원한 상태 기간이냐 물어보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서울에 있으니깐 재활 병원은 서울에 있는 곳으로 알아보려고 했는데 가족들이 지방에 있다고 말하니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도 괜찮다며 추천을 해주셨다.


 그러고선 3개월 안에 의식이 돌아오느냐 돌아오지 않느냐에 따라 예후는 크게 달라진다고 하였다. 동생은 현재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길래 혹시 동생을 직접 보신 거냐고 물었다. 분명 가족이랑 있을 땐 웃고 눈물도 흘렸다며 영상을 보여드렸다. 교수님은 영상을 보더니 표정이 다양해지는 건 좋은 거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니 의식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백혈구 수치가 올라가서 상태를 지켜보다 신경외과 교수님과 의논하고 병동을 옮긴다고 하였다. 설명이 끝난 교수님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전문 간병인이 동생을 돌보는 게 나은지 가족 간병이 나은지 물어보았다. 나의 질문에 교수님은 여건만 된다면 가족간병이 좋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이랑 지내다 보면 자극을 더 받으니 의식이 돌아오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나한테 더 이상의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고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면담이 끝나고 2층에서 간병인을 만나 선풍기랑 면도기를 전해주었다. 창가 자리에 있어서인지 땀을 많이 흘리고 열이 날 때가 몇 번씩 있다고 하여 선풍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가지고 왔다. 오늘은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아서 동생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번주부터는 나와 함께 하게 될 거니깐 며칠 후에 만나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볼 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가려고 버스 시간을 확인했는데 내가 타는 곳에서 방금 출발을 한 것 같다. 집으로 빠르게 갈 방법이 없나 싶어서 찾아보다가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른 경로를 이용했다. 동백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기흥역으로 가서 5001번을 타고 강남역에서 내려서 다시 지하철로 갈아탄 후 집으로 가기로 했다. 환승을 두 번 해야 하는 경로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번거롭긴 해도 그나마 빨리 갈 수 있는 경로였다. 이렇게 된 이상 강남역에서 환승하는 김에 작년 6월에 받았던 알레르기 검사지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찾으러 간다.


 집으로 가는 길. 버스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꿈을 가득 안고 서울에 상경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암울해졌다. 내 생각에도 재활병원은 가족들이 있는 양산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그리고 간병을 하려면 내가 동생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것도 맞다. 분명 옳은 일을 하는 거고 고민할 문제가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동생을 돌보려면 나의 20대를 포기해야 한다. 한 번뿐인 20대 시절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까워서 그런 걸까. 물론 아무도 나보고 간병을 하라고 등 떠민 적은 없다. 그렇다고 상황을 알면서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이 힘을 합쳐야 했다. 재활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1, 2년이라고 했으니 27, 28살 어쩌면 29살까지 동생의 재활을 도와야 할 수도 있다. 내 20대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갈 때쯤 나는 30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대는 이미 글러 먹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고 찬란한 30대를 맞이하려고 했는데 변수가 생겨버렸다. 정말 잘 살고 싶었다. 20대에 1억 모으기가 목표였는데 지금은 모아놓은 돈도 다 나갈 판이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동생이 빨리 의식을 차리고 재활을 열심히 받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야만 우리 가족의 일상이 예전처럼 평범하게 돌아갈 수 있다. 동생 성격이라면 본인이 답답해서라도 1년 만에 재활을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집으로 오는 내내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샌가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서울로 들어섰다.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났다. 이미 간병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지금까지 꿈꿔 왔던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럴 때 마스크라도 끼고 있어서 다행이다.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엉망일 게 분명했다. 강남에 도착해서는 눈물을 닦아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버스에서 내렸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을 보니 더 서글퍼졌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나를 향해 내리쬐는데 내 마음속에는 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이 와중에 알레르기 검사결과는 108종 모두 음성이었다. 표정은 곧 죽을 사람처럼 우울한데 그와 다르게 내 몸은 너무나도 건강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알레르기 하나 없이 면역력이 강한 사람인데 세상의 풍파도 이 정도 면역력이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2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동생의 재활을 도우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실무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면 교육계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었다. 계획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병원에 있으면 남아도는 게 시간일 텐데 이 참에 틈틈이 공부나 해야겠다.


 이대로 집으로 가기에는 아직 마음이 울적했다. 집에 가봤자 좁은 방에서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이렇게 된 김에 예전에 다니던 학원에 들리기 위해 김포로 이동했다. 이번 연도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실무 감각을 다시 익힐 겸 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자격증을 취득했던 곳이었다. 당장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아서 놔두고 있었는데 오늘이 아니면 가지러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김포로 향하는 버스를 타니 1월 달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학원을 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흘렀다. 그 짧은 사이에 내 주변 상황들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어느 종착지로 향하는지 알 수 있는데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 종착지를 알 수가 없다. 나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누가 나에게 귀띔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오랜만에 갔던 학원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수업을 해주셨던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하고 취업을 했냐고 묻길래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며 시간이 될 때 꼭 한번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에 다녀오면서 선물을 사 왔다며 나에게 건넸다. 깜짝 선물에 감사함을 전하고 선생님과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지나쳐가는 거리들,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지금이 꼭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내가 언제쯤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많은 추억이 생겼다. 지금 당장 내가 살던 집을 비우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가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방을 빼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지나 동생이 낫게 되면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 힘든 상황 또한 스쳐 지나가리라 믿고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나를 서글프게 하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좌우명이 ‘인생은 선택이다.’인 만큼 내가 내린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보겠다. 이번에 내가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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