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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Apr 10.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41 - 나의 보금자리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잠을 자다가 배가 살짝 아프고 싸한 느낌에 화장실을 갔더니 드디어 그분이 찾아왔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깐 다시 부족한 잠을 보충해 주었다. 그렇게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그리고선 의식이 흐르는 대로 행동했다. 일단 샤워를 하면서 화장실에 있는 물때가 거슬려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곰팡이 제거제와 락스를 뿌려가며 세면대부터 배수구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였다. 청소솔을 이용해 바닥을 열심히 닦아냈더니 얼룩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묵은 때가 벗겨지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면서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왕 하는 김에 창틀 청소까지 손을 댔다. 몇 개월 간 창틀 사이까지 할 엄두가 안 나서 대충 닦기만 하고 항상 방치했던 곳인데 청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밀린 빨래도 하고 안 입는 옷들도 정리했다. 한 동안 가득 차 있던 쓰레기통도 전부 비워냈다. 이제 간병을 가면 언제 집으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미리 정리를 시작했다.


 청소를 하면서 방안을 살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가 생각났다. 가구와 물건 하나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심 끝에 고른 것들이었다. 나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을 앞으로 정리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독립을 하면서 내 취향에 맞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랐었는데 본가로 가게 되면 전부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방 안에는 살림살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이사를 하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 둘 정리를 해가면서 안 쓰는 것들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지고 있어 봤자 한 동안은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내가 가진 옷들과 물건들이 짐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치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마음 같아선 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잠시 미쳐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 버린다는 말은 취소다. 이젠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도, 옷도, 신발도 나랑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병원에서는 다 필요 없는 것들이니 말이다. 이러니깐 마치 내가 입원을 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요즘 요일 감각이 사라져서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저녁에 만나면 무엇을 먹고 싶은지 선택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제야 오늘 저녁 약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약속 시간은 한참 남아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도대체 정신을 얻다 두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처한 현실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병원에 가지고 갈 것들도 조금씩 챙겨놓고 또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한참 동안 정리하고 있다가 친구랑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병원에 갈 때는 초췌하게 화장도 안 하고 옷도 트레이닝복만 걸치고 가지만 친구랑 만날 때는 다르게 나가 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사실 친구랑은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 대충 나가도 되지만 모처럼 기분 전환을 하려고 화장을 했다. 나는 역시 화장하고 꾸밀 때가 제일 재밌다. 단점을 가려주고 장점을 부각하며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화장의 매력인 것 같다. 내가 이 매력 때문에 미용을 시작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에 젖어들 때가 아니었다. 얼른 준비를 하고 나가야 한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약속 장소로 가보니 엉뚱한 곳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친구를 불러서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 후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입구부터 개성이 넘쳤다. 인테리어로 카우보이 모자와 톱, 각종 장비들이 있었고 볼펜조차 도끼 모양이었다. 아주 지독한 마초 콘셉트이다. 나름 독특한 분위기가 신선하기도 하고 음식도 꽤 맛있었다. 다음에 재방문해도 좋을 것 같다.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지막으로 만난 게 2월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얼마 먹지 않은 나이긴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게 실감이 난다. 심지어 그때와 지금의 주변 상황은 또 달라져 있었다.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친구랑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입에서는 나올 것 같지 않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을 느낀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서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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