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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Apr 18.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49 - 서로의 노력

2023년 3월 22일 수요일


 오늘은 아침부터 울고 싶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자고 있는 사이에 바닥이 소변으로 흥건해졌다. 안 그래도 새벽에 간호사가 나를 깨우더니 소변 주머니에서 소변이 샜다며 청소해 주는 여사님을 불러 주겠다고 했었는데 일어나 보니 그대로였다. 눈곱도 덜 뗀 채로 핸드타월을 마구잡이로 뽑았다. 6시 반에 일어나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소변을 닦고 있는 내 모습에 너무 암울해졌다. 며칠 전에 유튜브에 떠도는 '진짜부부'의 '비 오는 날 결혼식'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신부를 보니 즐기는 자가 세상의 승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영상처럼 노래까지 부를 힘은 나지 않았지만 신나는 노래를 생각하며 어질러진 것을 치웠다. 이쯤 되니 세상을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냥 즐기면서 유쾌하게 살다가기도 짧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병원에서의 일과는 어제오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동생의 컨디션 정도라고 해야 할까. 어제는 열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는데 오늘은 그나마 나아진 것 같다. 물론 재활 훈련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긴 했지만 말이다. 요즘에 너무 자주 자는 것 같다.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 재활이 너무 고돼서 그런지 하루종일 졸음이 쏟아지는 얼굴이다. 아무래도 내가 간병을 하고부터는 동생도 쉴 틈이 없었을 거다. 모든 게 오래 걸려서 더 그렇다. 모든 걸 정석으로 하려다 보니 시간이 촉박한 것 같다. 진짜 24시간이 모자라다는 말은 여기에 써야 할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이 하루종일 바쁘다는 의미까지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진짜 쉴 틈이 없다. 케어를 하려니 시간이 부족하다. 내일의 시간까지 당겨서 써도 모자랄 판이다. 물론 이전보다는 노련해졌지만 여전히 기저귀를 교체하는 일은 오래 걸린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하필 재활 훈련 시간에 용변을 누는 바람에 급하게 기저귀를 열어봤더니 아주 갈색 범벅으로 떡칠이 되어있었다. 오늘 새로 붙인 엉덩이 패치까지 다시 교체해야 했다. 배변 유도제를 뺐다고 해서 대변을 못 누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상이 없고 설사도 아니었다. 궁금하진 않겠지만 초콜릿이 적당히 녹아서 꾸덕한 정도였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적절한 예시인 듯하다.    


오늘부터는 재활실로 이동을 할 때 휠체어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어느 정도 목을 가눌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력의 자극도 받으면서 앉아 있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휠체어를 타는 것이 좋다고 했다. 잠시 후 이송을 해주는 담당자가 왔는데 두 명이 붙어도 동생을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침대가 놓여 있는 자리가 협소해서 더 그랬다. 시간을 맞춰 왔지만 휠체어에 태운다고 늦어졌다. 그리고 다른 환자를 이송해야 한다며 기다릴 수 있냐 묻길래 그것까지 기다리면 가뜩이나 재활시작 시간이 지났는데 더 늦어질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끌고 갔다. 그런데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휠체어 운전을 잘하는 것 같다. 나름 코너링이 부드럽다. 주차도 잘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동생의 의견 따위는 물어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일어나서 따지던가.


 동생은 재활을 하는 내내 잠이 오는지 하품을 했다. 작업 치료를 할 때는 주스로 혀에 자극을 주니깐 오랜만에 달콤함을 맛보며 정신을 번쩍 차리던데 오늘은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하라는 대로 하긴 하지만 어제만큼 반응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그래도 자꾸 손과 다리를 움직이고 싶은 건지 힘이 들어간다. 피곤하지만 할 건 해야겠고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모습이다.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받아서 힘들긴 하겠지만 일상으로 복귀를 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동생을 아주 강하게 훈련시키는 중이다. 마음에 안 들면 말로 항의하면 된다.


 나도 나름 병원 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주변을 볼 여유도 조금씩 생겼다. 어제 동생의 여자친구에게 받은 빵을 병실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더니 오늘 뜻밖의 선물이 돌아왔다. 동생의 침대 맞은편에 있던 간병인분은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려주시고 오늘부로 간병이 끝난 건지 빵을 잘 먹었다면서 두유를 건넸다. 그리고 옷걸이도 많이 필요할 거라면서 나에게 주고 떠나셨다. 마침 옷걸이가 필요했는데 잘됐다. 또 다른 간병인분은 동생이 재활을 끝내고 올 때마다 감사하게도 침대로 옮기는 것을 도와준다. 재활치료실에서 만날 때면 인사도 한다. 역시 사람들이 친해지는 데는 먹거리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이제 편하게 놀아줄 방법도 찾은 것 같다. 이때까지는 계속 동생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하루종일 서있는 채로 재잘거리기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그래서 창가 난간에 걸터앉아서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욱신거렸다. 내일 진료를 한번 받아봐야 할 것 같다. 자체적으로 진단해 본 결과 아킬레스건염인 것 같은데 동생 재활시간에 맞춰서 잠시 정형외과를 들려야겠다. 내가 건강해야 간병을 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밖을 보니 날씨가 좋아서 동생에게도 구경을 시켜주려고 블라인드도 치고 창 밖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창가자리라서 햇볕도 잘 들어온다. 갑자기 너무 밝아진 세상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동생이 힘겹게 눈을 떴다. 서핑하기 좋은 날씨라고 하니 피식 웃는다. 동생의 의식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건지 기저귀를 갈려고 하니 손으로 막는다. 제법 말도 잘 알아듣는 것 같다. 나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게 창피하면 직접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라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수많은 살덩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쪽팔려하지 말라고 말하니깐 어이없는 듯 웃는다. 이제는 웃는 소리만 들어도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아주 날이 갈수록 남매의 우애가 깊어지는 중이다.

  

 이제는 가족한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도 조금씩 반응을 해준다. 동생의 재활을 도와주는 치료사가 말을 걸면 한 번씩 웃어준다. 동생이 웃는 모습을 본 치료사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지금  자기 말에 웃은 것 같다며 흥분을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동생이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본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때는 온몸에 근육경직이 심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동생이 키가 커서 재활치료사들이 너무 힘들다고 장난치는 말에도 웃으며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오늘은 재활실에서 엄지척도 해줬다. 계속 시킨 보람이 있다. 나날이 의식을 조금씩 되찾는 게 눈으로 보이니깐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병실에서는 동생의 손에  물건을 쥐어주며 촉감놀이도 하고 손가락 씨름도 했다. 혼자서도 하루종일 떠들 수는 있지만 반응이 없으면 심심하다고 동생한테 얼른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동생이 전보다 나아진 점이 있다면 감정표현이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그런데 눈물이 나올 때는 항상 악몽을 꾸는 것 마냥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눈물을 흘린다. 내 눈에는 동생이 스스로 깨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전에 교수님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동생이 혼미상태를 넘어서서 이제는 졸림 상태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교수님이 의식상태를 설명해 줄 때 혼미상태에서 조금 더 나아지면 졸음이 계속 쏟아지다가 그 시기를 넘기면 의식이 또렷해진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단지 재활훈련과 일과를 소화하려니 힘들어서 계속 자는 줄 알았는데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아무래도 조만간 의식이 확실하게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2주도 안 걸릴 듯하다. 동생은 지금도 너무나 애쓰고 있다는 게 보인다. 나도 옆에서 좋은 말도 더 많이 해주고 의식을 빨리 회복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조금만 힘을 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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