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아래 아직 말이 서툰 아이처럼

첫 호박꽃

by 루씰

오랜만에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일찍 눈을 떴다.

세상은 아직 고요했고, 어제 내린 빗방울이 텃밭 가장자리에 살짝 남았다.

커피 한 모금 마신 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당으로 나가봤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나뭇잎을 쓰다듬고, 자라난 풀을 한 움큼 뽑았다.

문득 한 송이 노란빛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편이 봄에 심어 둔 호박 씨앗에서 피어난 첫 번째 꽃.

단단한 땅을 뚫고, 바람에 흔들리며 뻗어 오른 줄기 끝에

고운 노란 꽃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피었다.

햇살 아래 아직 말이 서툰 아이처럼 조심스레 봉오리를 열었다.

나는 그 조용한 개화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작은 꽃 하나가 텃밭의 풍요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작은 꽃 하나가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지 흙을 다루다 보면 몸이 먼저 배운다.

비에 씻기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볕에 목마르면서도 줄기는 자라고,

뿌리는 포기하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깊게 내려간다.


겉으론 아무 일 없는 것 같아도

삶은 언제나 땅 아래에서 먼저 자란다.

그리고 삶에서 피어나는 것 중 쉬운 건 단 하나도 없다.


호박꽃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를 예고하는, 작고도 결정적인 시작이다.

겉보기엔 눈에 잘 띄지 않고 커다란 잎사귀 사이 숨겨진 듯 피어나지만

그 꽃 하나가 있다는 건

씨앗이, 그리고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젊은 시절엔 결과만을 좇았다.

속도에 집착했고, 늘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기다림은 손해 같고, 멈춤은 낭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삶은 꽃이 피는 순간보다 그 꽃이 피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품는 시간이

훨씬 더 깊고 귀하다는 걸.

그 작은 꽃 한 송이가 나를 가르쳤다.


조용히,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는 것이

가장 단단한 삶의 방식일 수 있어.


나는 그날, 호박꽃을 본 게 아니라 내 삶을 다시 본 것이다.

지나온 세월 동안 내가 심고도 잊었던 많은 씨앗들,

그중 몇몇은 아직 땅속 어딘가에서

이처럼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더는 조급해하지 않는 것.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며, 뿌리를 다지듯 마음을 다잡는 것.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노란 꽃 하나가

조용히 나를 불러줄 그 순간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삶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선물은

그 결과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깨닫게 되는

묵묵한 다정함이라는 걸

오늘 피어난 호박꽃 한 송이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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