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오이
낮은 담장 아래,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늙은 오이를 바라본다.
마치 뒷방 늙은이처럼 싱싱한 애오이에 밀려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엔 수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였다.
투박한 껍질, 울퉁불퉁한 겉모습.
짙은 초록의 향기마저 사라져
누군가에겐 낡고 필요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엔 말없이 흘러간 계절의 흔적이,
뜨거운 햇살과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조용히 쌓아온 삶의 무게가 담겼다.
한때는 작고 연했을 것이다.
신선함으로 환영받고, 보기만 해도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보기 좋은 겉모습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지니게 되었다.
속은 단단해졌고, 맛은 더욱 진해졌다.
단지 오랜 시간 땅속에서, 햇살 아래에서, 바람 사이에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지켜낸 대가일 뿐이다.
사람도 늙은 오이와 다르지 않다.
젊은 날의 화려함은 누구의 눈에도 쉽게 들어오고,
그 시절의 생동감은 찬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몸은 낡아지고, 생기마저 줄어든 듯 보일 때
그때야말로 사람의 진짜 면모가 드러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반짝임은 사라지고,
대신 눈빛은 더 깊어지고, 말 한마디에도 울림이 생긴다.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이별을 지나온 이들은
더 이상 요란하게 무엇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곁을 지키고, 말보다는 눈빛으로 마음을 전한다.
늙은 오이는 그 자체로 삶의 태도를 말해 주는 듯하다.
빠르게 소모되는 세상 속에서도
속도를 늦추고, 제 자리에서 묵묵히 익어가는 것.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 않고, 그저 온몸으로 계절을 견뎌내는 것.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존재들이 더 깊이 와닿는다.
반짝이는 청춘보다, 느리게 익은 노년의 깊이에 더 마음이 끌린다.
가끔은 나 자신도 그런 늙은 오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겉은 거칠어지고, 젊은 시절의 생기나 탄력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 안에는 오히려 더 단단하고 진한 무언가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던 따뜻함과 여유,
조금씩 깨달아가는 삶의 의미 같은 것들 말이다.
늙은 오이가 말해 준다.
진짜 아름다움은 화려한 포장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세월을 견뎌낸 것들이 간직한 깊이에 있다고.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그렇게 늙어가고,
그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고.
그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온전히 살아낸 이들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견뎌내며,
저마다의 빛깔과 맛을 가진 늙은 오이로 익어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