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의 시간이 이렇게 살아 있다

A Time For Us

by 루씰

남편이 김장배추 심을 텃밭을 곱게 갈았다.

시들어버린 강낭콩이 머물던 자리.

그 자리 위에 다시 푸른 숨결이 내려앉는다.

한쪽에선 아직도 고추와 가지, 토마토, 호박, 들깻잎이 기세 좋게 살아 숨 쉰다.

하지만 곧 그들도 제 자리를 내주고, 뿌리째 뽑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그렇게, 새것을 품고 낡은 것을 놓아준다.


종일, 로미오와 줄리엣의 'A Time For Us'를 듣는다.

그 선율은 지난 시간을 끌어와 가슴에 얹는다.

삶은 옥수수 냄새 속에 얇은 슬픔이 스며들고

옥수수 알을 깨무는 순간, 눈물이 먼저 혀끝에 번진다.

짠맛보다 깊은 것은 기억이다.

그리움은 늘 아무런 예고 없이 밀려온다.


남쪽,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

우리의 시간이 거기 묻혀 있다.

아침이면 ‘A Time For Us’의 선율로 잠을 깨던 날들

남편이 늘 들려주던 음악.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미고,

기척도 없이 하루가 밝아오던 그때.


“A new world,

새로운 세상이,

A world of shining hope for you and me.

빛나는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 당신과 날 위해”


눈을 비비며 뒷마당으로 나가면

남편이 호스를 높이 들어 텃밭에 물을 뿌리고 있다.

물줄기가 햇살을 받아 쏟아질 때

신혼의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 반짝이는 물방울들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들은 빛나는 별처럼 마음에 박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And with our love, through tears and thorns

눈물과 고통으로 얻어진 우리의 사랑으로

We will endure

우린 견뎌낼 거예요.”


그 물방울을 노려보며 찡그린 얼굴,

남편은 그때의 나를 올리비아 핫세보다 아름답다 했다.

툇마루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단다.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자기 가슴을 찢어 조그마한 나를 넣어 다니고 싶다고.

나는 웃으며 흘려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말들이 참으로 진심이었구나 싶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A time for us


강낭콩의 자리를 배추가 차지하듯

모든 것은 그렇게 이어지고, 또 사라진다.

아무리 푸르고, 아무리 아름다워도

시간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 해도,

그때의 숨결, 온기, 그 사랑은 마음 어딘가에 묻혀

언제든 불쑥 되살아난다.


가을이 오면 다시 배추를 심을 것이다.

가지와 고춧대를 뽑으며, 또 눈물이 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A Time For Us’를 들을 것이다.


아름다웠던 시간들,

어쩌면 그리움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흘려보낸 날들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고

여전히 그 자리에 사랑이 있다.


A time for us.

우리의 시간이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

지나갔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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