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에게
텃밭 가지가 제철을 맞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보라색 가지들이 줄기마다 탐스럽게 열렸다. 가지를 보면 어김없이 한 사람이 떠오른다. 대전에 사는 선아. 내게는 동생 같은, 아니 친동생보다 더 가까운 글 쓰는 후배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막내였다. 손 위로는 늘 나를 챙겨주는 언니 오빠들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챙기는 일에는 서툴렀다. 사랑을 주기보단 받는 게 익숙한 삶. 그런데 선아는 그런 내게도 자신의 마음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가지를 좋아하는 아이. 가지밥도, 가지무침도, 가지튀김도 좋아해서 여름만 되면 가지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나는 선아에게 가지밥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가지를 양껏 볶아 쌀과 같이 안쳐 밥이 되면 양념장에 비벼 먹는다. 그 애에게 배워 가지밥을 처음 맛보던 날, 그 구수하고 달큼한 맛에 눈이 커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받는 걸 어색해하지 않는 아이. 내가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그 애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
대학에 진학한 내 큰딸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까지 설득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통장에 찍히는 목돈, 어쩌다 머물던 내 집에서 돌아갈 때마다 남기고 가는 소소한 선물들, 머문 값을 따로 챙겨 주는 꼼꼼함까지.
그런 아이였다.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마음들로 가득 찬.
나는 선아에게 생가지를 보내지는 않는다. 제철이라 어디서나 쉽게 사 먹을 수 있고, 여름 가지는 물러서 멀리 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 가지를 하나하나 따서, 햇살 좋은 날 골라 말린다. 가을이 끝나갈 즈음, 조심스레 꾸려 보낸다. 텃밭에 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땐 장날에 나가 할머니들한테서 가지를 사 모은다.
늙은 호박도 잘라 속을 파내고, 고구마와 새우젓을 곁들여 묶은 작은 꾸러미.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는 선물이지만 그게,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삶 속에서 건네는 가장 정직한 인사.
보라색 가지는 이상하게도 선아를 닮았다. 매끈하고 길쭉한 모습이, 큰 굴곡 없이 살고자 애쓰던 그 애의 모습과 겹친다. 말없이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 누구에게도 무리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랑을 건네는 사람.
결혼할 생각이 없다던 선아는 늦게 좋은 인연을 만나 윤영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어느새 5학년이 되었다고 했다. 문득,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싶었다.
윤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뭉클하다. 그 녀석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나는 여전히, 선아가 나눈 마음을 따라잡지 못한 채 이렇게 계절마다 가지를 말린다. 조그만 꾸러미 하나에 담긴 정성이, 선아와 윤영에게 무언의 응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언젠가 녀석이, 엄마가 말린 가지로 지어주던 가지밥을 기억하게 되기를. 그 보랏빛 안에 담긴 계절의 온기와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봐 주기를.
선아도 이제 쉰을 훌쩍 넘겼다. 우리는 제법 살아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삶의 속도가 예전만 못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움직인다.
가지를 말리는 동안, 나는 자주 지난 시간을 되짚는다. 선아와 나누었던 웃음과 눈물, 함께 먹던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소소한 반찬들, 편지처럼 건넨 작은 정성들이 되살아난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텃밭의 가지는 더 진한 보랏빛을 품는다. 그 가지들이 마를 무렵, 나는 또다시 선아를 생각하며 작은 꾸러미를 묶을 것이다. 이 계절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진심 어린 사랑의 방식이다.
오래도록, 그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