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모퉁이 들깻잎
여름 끝자락, 텃밭이 웅성댄다.
오이는 늙고, 고추는 벌겋게 물들며, 가지는 어깨를 늘어뜨린다.
생명은 마지막까지 몸을 키워 종자를 남기려 한다.
터지고, 시들고, 농익으면서도 끝내 아름답다.
남편은 넘치도록 거름을 줬다. 땅은 충실히 응답했다.
작은 텃밭은 마치 한철만 사는 정원처럼 넘쳤고,
나눌 곳도, 받아줄 곳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집 모퉁이, 햇살이 스치듯 다녀가는 그늘진 땅에 들깻잎을 심었다.
텃밭을 놀리지 않겠다는 마음, 땅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었을까.
작은 들깻잎이 그늘 아래 조심스럽게 자랐다.
비닐하우스 옆 조선부추는 딸을 향한 사랑처럼 조용히 무성해졌다.
"엄마, 부추도 심어. 나 부추 좋아해."
그 한마디에 남편은 서둘러 씨앗을 사 왔다.
큰딸은 결혼한 지 이 년이 안 되었고, 아직 아기도 없다.
직장을 다니며 제 딴에는 밥을 해 먹는다고 한다.
엄마가 말은 안 해도, 배달 음식이나 외식을 걱정할 걸 알고 방패 삼아 한 말이리라.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뭘 심었는지, 뭐 하는 중인지, 그런 걸 곧잘 묻는다.
"엄마, 뭐 해?"
큰딸의 전화는 언제나 그 말로 시작된다.
습관처럼 툭 던지는 말인데, 나는 그 말에 기꺼이 반응한다.
지금 텃밭에 뭐 심었고, 뭐가 자라고 있고,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다 보면 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잠시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
남편은 하우스 옆 해 잘 드는 담 밑에 부추 씨앗을 정성껏 뿌렸다.
비좁은 그곳은 내가 잘 들여다보지 않는 공간이다.
실낱같은 부추 사이에 난 잡초를 힘들게 뽑으며 남편은 딸을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딸이 왔을 때 부추는 아직 어렸다.
부추가 자라났을 땐, 딸은 오지 않았다.
계절은 그렇게 엇갈리고, 마음은 뒤늦게 도착한다.
한때 나는, 텃밭의 열매들을 한 아름 안고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며 작가 모임에 가곤 했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도, 흙 내음은 사람들 손에 닿았고, 함께 나누었다.
나눔은 늘 기쁨이었다.
얼마 전, 모 출판사 주간 L을 만날 때 일이다.
그날 아침, 나는 텃밭을 둘러보며 뭘 챙겨야 하나 고민했는데,
마침 전날 남편이 텃밭을 한 바퀴 돌며 먹을 만한 것들을 몽땅 따서
이웃들에게 돌리고 난 참이었다.
내가 미리 말을 안 해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이 없자 마음이 허전했다.
텃밭에 나가 주렁주렁 달린 오이고추와 덜 익은 토마토 몇 개를 모았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두고 먹던 강낭콩이 봉지째 있었다. 그것도 함께 챙겼다.
그렇게 들고 나선 길이지만, 마음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았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충분히 주지 못했다는 마음, 그게 걸렸다.
텃밭이 늘 넘치던 시절, 더 많이 건넬 수 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날은 그런 넉넉함을 미처 챙기지 못한 날이었다.
텃밭은 그저 채소를 기르는 땅이 아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을 전하고 싶게 만드는 마법 같은 장소다.
잘 익은 오이 하나, 푸르른 고추 몇 개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
그게 텃밭의 방식이다.
언니들과 형부가 와서 채소를 쓸어갔다.
치매 초기인 큰언니는 음식 하는 법도 잊은 듯, 채소를 보고도 별 욕심을 안 냈다.
덕분에 작은언니만 횡재했다.
나는 부추 한 다발을 베어 작은언니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쪽으로는 자주 가지 않다 보니, 부추가 그만큼 자란 줄도 몰랐다.
주택에 사는 작은언니는 한 곳에서만 40년 넘게 살았다.
이웃이 많아, 아무리 채소를 많이 가져가도 누구 주고 또 누구 주고 하다 보면,
정작 자기네 먹을 건 얼마 안 된다고 한다.
그 말이 어쩐지 흐뭇했다.
텃밭은 넘치도록 자라나,
누군가의 식탁으로 가고, 마음속으로도 간다.
돌고 도는 것들.
채소도, 사랑도, 계절도.
집 모퉁이 들깻잎 하나,
그 작고 조용한 생명도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을 부른다.
그게 텃밭이 우리에게 주는 방식이다.
삶은 그렇게,
아주 조용히 자라고, 익고, 나누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