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심는다
저녁이 되니 비가 쏟아진다.
묵직한 구름 아래, 빗소리는 텃밭을 적시며 하루를 덮는다.
남편이 베란다에 서서 비를 바라본다.
말은 없지만, 표정엔 만족이 그득하다.
비는 텃밭을 위한 축복처럼, 우리가 심은 씨앗들을 조용히 감싸준다.
오늘 무와 순무, 쪽파 씨앗을 심었다.
윤유월 늦더위에 달력을 몇 번이고 넘겨보다 결국 배추는 포기했다.
씨앗으론 늦었고, 미리 모종을 준비한 이웃의 손길에 기대기로 했다.
머뭇거리다 놓치는 게 많아지는 나이,
그래도 누군가의 시작에 발맞출 수 있어 고맙고 든든하다.
아침을 거르고 미용실에 다녀왔더니 점심이 훌쩍 지났다.
겨우 미역국에 밥 한술 말아 삼키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어서 나와!”
해가 들쭉날쭉 드나드는 걸 보니 곧 비가 올 모양이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이 일주일 앞에 서 있다.
내 마음은 이미 남국의 바다에 닿았는데, 남편은 땅 위의 시간표를 먼저 챙긴다.
여행 일정과 씨앗 심는 시기가 엇갈릴까 봐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에 오늘 씨앗을 꼭 심어야 한다며 안달이 났다.
여행을 앞두고도 마음은 텃밭을 떠나지 못한다.
“지금 밥 먹고 있다고!”
냅다 소리는 쳤지만, 숟가락을 놓고 부랴부랴 밭으로 나갔다.
하늘은 텃밭 농부를 놀리듯 변덕스럽게 흐렸다가 개고,
남편은 비를 기다리는 밭보다 더 애가 탄다.
밭 세 이랑엔 전날 비닐을 깔아놓았다.
한 이랑엔 순무, 두 이랑엔 무 씨앗을 심기로 했다.
올해 첫 무의 줄기가 땅을 뚫고 나올 상상을 하며 한 줄 한 줄에 마음을 실었다.
남편은 손수 만든 구멍 뚫는 도구로 비닐에 꾹꾹 구멍을 낸다.
겉보기엔 단순해 보여도, 그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비닐이 뚫리도록 쇠파이프를 깊게 눌러야 하기에 이마엔 금세 땀이 맺혔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멈추지 않는 손 끝에 농부의 책임감과 애정이 흐른다.
나는 옆에서 깨알 같은 씨앗을 서너 개씩 집어 구멍 속에 정성스레 넣고 흙을 덮었다.
미용실에서 단장한 머리는 땀에 흠뻑 젖고,
손톱에 흙이 새까맣게 끼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젖은 머리칼이 오늘의 풍경을 더 생생히 기억해 주리.
쪽파는 비닐 없이 맨땅에 심었다.
촉촉한 흙 위에 자라날 쪽파들 사이로 쪽파보다 먼저 자리 잡을 잡초들이 떠오른다.
아직 피지도 않은 그것들이 벌써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또한 자연의 순리라면 기꺼이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잡초를 뽑으며, 동시에 나 자신도 다듬는 날들이 될 것이다.
씨앗을 심고, 계절을 가꾸고, 삶을 정돈한다.
무성했던 여름을 걷고, 다시 가을을 심는다.
심고, 거두고, 다시 심는 일.
말없이 땀 흘리고, 비 오는 날 텃밭을 바라보며 안도하고,
작은 씨앗 하나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일.
우리 삶도 그렇게 한고비씩 넘어간다.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비 오는 저녁, 젖은 땅을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