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예고 없이 멈추는 시간을 맞이한다

빈집에게 남기는 편지

by 루씰

가끔은 일상의 사소한 습관이 삶을 말해주는 진심이 된다.

나는 외출할 때면 가장 깨끗하고 좋은 속옷을 고른다.

혹시 이 길의 끝이 어디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때문일 거다.


돌아오는 길이 늘 보장된 건 아니라는 걸 살아오며 배웠다.

그래서 나는 떠나는 순간마다

내 삶의 가장 안쪽을 조용히, 단정하게 매만진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이 며칠 안 남았다.

햇살과 파도, 그리고 느긋한 시간이 기다리는 곳.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는 옷장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비우고,

남편 방과 서재, 집 안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아본다.


오래된 찻잔, 여름에만 꺼내 쓰는 유리컵,

화분의 마른 꽃잎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내가 살았던 이 집의 시간들을 잠시 접으려 한다.


큰딸과 사위, 그리고 남편과 함께 떠나는 여행.

그러나 나에게 이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는 일은 지상에서의 인연을 잠시 내려놓는 일과 같은 것.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남겨진 사람들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지

그 조용한 상상에 마음이 오래 머문다.


나는 작은딸에게 문자를 보낸다.

항공편과 일정, 호텔 이름 같은 정보들 뒤로

평소엔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덧붙인다.


보험 서류는 어디에 있고,

아빠와 엄마의 통장은 어느 은행인지,

비밀번호는 무엇인지.

그리고 사위가 건넨 용돈 몇 장은

서랍 깊숙이 고이 넣어두었다는 것까지.


혹여 잊힐까 봐

그 애가 아직 모를 것들도 천천히 풀어낸다.

생활협동조합의 출자금,

책 인세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어느 출판사에 연락해야 하는지,

그 작고 조용한 정보들을 딸에게 남긴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즐거운 여행 앞두고 왜 이리 무겁냐고.

괜한 불길한 생각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불운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예의 있게 마무리하려는 마음이라는 걸.

돌아오면 기분 좋은 집이기를 바라고,

혹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내가 살았던 흔적이 누군가에게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결벽증이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청소는 대충 할 때가 많고,

겨울엔 세수를 건너뛰는 날도 있고,

수영장에서 쓰고 온 수건을 그대로 말리는 일도 흔하다.


그저 떠날 때는 다르다.

이건 오래된 나만의 의식이다.

내 삶을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아서.

어디서 끝이 나더라도,

그 자리가 단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삶은 언제 어떻게 꺾일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예고 없이 멈추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방을 싸기 전

집 안의 공기와 물건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눈다.

창틀을 닦고, 현관 앞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며.


이 공간이 내가 살아온 시간의 일부였다면,

나는 그 시간에 최대한 정갈한 이별을 건네고 싶은 거다.

어쩌면, 삶의 모든 순간은

다음 순간을 위한 연습이고

마지막 순간을 위한 작은 예고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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