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찰구를 찾아서
모 출판사 주간 L과 오랜만의 해후.
십 년도 더 훨씬 전, 편집자와 작가로 만나 여러 권의 책을 작업하며 친해졌다. 동생 같고, 때론 언니 같고, 이젠 친구처럼 편안한 그이가 몇 주 전 새 출판사에 들어갔다고 톡을 보냈다.
“응? 어떻게?”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게 당연하다. 50대 초반에 마지막 출판사를 그만둔 뒤 나이 많다고 써주는 데가 없어 그동안 프리랜서로 일했다. 어쩌다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함께 책을 내는 일이 자연스레 사라졌고, 각자의 생활을 알차고 단단하게 이어갔다. (맞지? ㅋ)
“그렇게 됐어요. 어쨌든 만나요.”
어쨌든 만났다. 외모로는 여전히 젊고 단아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평생 출판사에 몸담고 한 가지 일만 해온 능력 있는 사람을 거부하는 출판계가 야속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러 우리는 세 시간 넘게 이야기에 빠졌다. 아니, 주로 내가 흥분해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입이 처음 열린 사람처럼.
헤어질 때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다. 집이 멀기에 외출해서 돌아갈 때의 습관이다.
“지하철에 화장실 많은데요, 뭐.”
L이 말했다. 카페 밖으로 나가 한 층 오르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번거로움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그럴까?”
카페를 나와 L은 사무실로, 나는 지하철로 향했다. 영등포구청역, 낯선 동네를 터덜터덜 걷는데 인도에 바로 붙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5호선 김포공항이 지하 5층으로 표시되었다. 김포골드라인으로 갈아탈 역이다.
무릎이 아파 지하철에선 되도록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땐 항상 두리번거리며 계단이 아닌 길을 찾는다. 익숙한 역이 아니면 더 그렇다.
웬 떡이냐 싶어 얼른 타고 지하 5층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바로 승강장이 쫙 펼쳐졌다.
어라? 카드도 안 찍었는데… 그냥 지하철 타도 된다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어리둥절한 채 철로 건너 승강장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모습, 익숙한 풍경.
이게 맞는 거야? 아니면, 내가 지금 도둑처럼 들어온 거야?
그럴 리가.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다급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또 계단이 나와 꽤 많은 층을 올랐다. 몇 군데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저기요, 왜 5호선에 승강장이 바로 나와요? 엘리베이터 탔는데 개찰구가 없어요.”
눈에 띄는 땅딸한 총각을 붙잡고 물었다. 총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역무실 쪽을 가리켰다. 나중에 보니 과일과 채소를 파는 가게였는데, 그 총각은 한창 손님을 부르는 중이었다. 그때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으니.
그래도 역무실이 가까이 있어 다행이네.
역무실에 가서 숨을 고르며 설명했다. 직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저기 문으로 나가서 개찰구로 찍고 들어오시면 돼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마치 그걸 몰랐던 내가 이상하다는 듯.
개찰구 옆 드나드는 문을 밀고 나가 카드를 찍고 다시 들어왔다. 그제야 참았던 소변이 급해졌다. 화장실 표시를 찾아 두리번거리니 세상에, 지하 1층이다.
여기가 몇 층이지?
화장실을 찾아 다시 계속 올라갔다. 볼일을 마친 뒤 5호선 김포공항 표시만 따라 지하 5층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어머나!”
아까 내가 타고 내린 엘리베이터 옆에 덩그렇게 놓인 개찰구가 보였다. 눈높이 낮은, 노인을 배려한 듯한 기계. ‘밖으로 나가실 때’와 ‘열차에 타실 때’라는 안내 문구와 눈에 띄게 칠해진 노란 화살표.
아까는 왜 이걸 못 봤지?
분명히 거기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펼쳐진 승강장에 놀라 허둥대기만 했다.
그랬다. 잠깐이지만 나는, 온몸으로 혼란과 불편, 불쾌와 죄책감을 겪었다. 내 눈의 위치가 어긋나니 안 보였고, 내가 잘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안내가 없었을 뿐인데.
그건 단지 ‘나’라는 개인의 경험이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매일 겪고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냥 지하철을 탔다면?
분명 꺼림칙한 일이었을 거다. 카드를 안 찍은 죄책감, 도덕적으로 어긋난 행동이라는 불편함.
나는 그걸 감당하기 어려워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올랐고, 지하 5층에서 1층까지 헤매며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도, 나만은 나를 속일 수 없어서.
도덕이란 건 남이 보든 말든, 결국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거니까.
그런데… 그런 도덕을 지키려 애쓰는 국민은 지금, 뭘 보고 있지?
위정자들, 권력과 기회를 쥔 사람들은 법을 우습게 여기고, 도덕을 장식처럼 쓴다. 책임지지 않고,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아니면 아예 뻔뻔하게 웃는다.
나는 겨우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했는데, 그들은 국민 세금을 마음대로 쓰거나 빼돌려도, 뻔히 거짓말을 해도 당당하게 살아간다.
화가 났다. 불균형, 불공정, 그 위선.
왜 국민은 이토록 조심스럽고 도덕적이어야 하고, 왜 위정자들은 이토록 뻔뻔할 수 있을까.
도덕은 왜, 약한 자에게만 강하게 작동하는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데, 이 사회에서 누가 진짜로 양심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이게 바로 시민이며 국민이다, 위정자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