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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스트 정 Nov 20. 2024

경쟁사회가 남긴 결핍의 흔적들

학원에서 딸의 담임 선생님 말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성적으로만 판단해요. 중학교는 추첨으로 배정되지만, 아이들은 벌써부터 대학 입시를 걱정합니다. 1, 2등을 다투는 아이들마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물었다. “아빠, 학교 다닐 때 몇 등 했어?”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빠는 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딸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난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가고 싶어.” 열두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분명 어른들의 영향을 받은 말이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코딩 학원, AI 영재교실, 창의력 캠프까지.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달리기 해야 하는 세상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학원을 오간다. 오전엔 학교, 오후엔 영어와 축구, 저녁엔 피아노학원까지. 아들의 하루는 빽빽한 시간표에 쫓기고 있다.     


아내는 작년부터 없던 병이 하나둘 찾아왔다. 업무 스트레스로 머리에 대상포진이 생겼고, 처음 겪는 알레르기로 오른쪽 눈 밑이 부었다. “경쟁은 심해지고 일은 늘어나는데, 이제 체력이 안 따라가.”라며 한숨을 쉰다.     


경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더 나은 성과, 더 높은 효율성을 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다. 여유로운 저녁 시간, 취미를 즐기는 주말, 가족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학원 스케줄 속에 묻혀간다.     


지난 주말, 아내와 장을 보다가 옛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시장에서는 상인들이 가끔 덤을 줬다. “예쁜 아가 서비스야” 하면서 귤 한 알을 더 얹어주던 정이 그립다. 지금 대형마트에서는 모든 게 그램 단위로 잘라 팔린다. 경쟁이 만든 효율의 세상에서 인심은 사라져 간다.     


요즘 젊은이들은 ‘욜로’(You Only Live Once)를 외친다. 무조건 경쟁하며 사는 대신, 현재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동네 작은 책방을 열어 책과 함께 손님을 맞는 청년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경쟁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도 작은 숨구멍을 찾았다. 아내는 주 2회 요가만큼은 양보하지 않는다. “이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한 거예요.”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보상 시간을 마련했다. 하루 중 30분, 유튜브를 시청하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제는 우리 집의 소소한 규칙이 됐다. 아들은 축구 영상을 보며 즐거워하고, 딸은 아이돌 일상 브이로그(vlog)에 푹 빠져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긴장이 풀어지는 게 보인다. 학원과 학교생활에 지친 아이들에게, 이 작은 자유만은 지켜주고 싶다.  

   

경쟁사회는 우리에게 성과와 효율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여유와 관계의 결핍이라는 상처도 남겼다. 


매일 밤, 아이들 방을 보며 생각한다. 학원 숙제로 날카로워진 딸, 해가 일찍 저무는 요즘 “오늘은 피아노 안 가면 안 돼?”라며 축 처진 어깨로 침대에 누운 아들. 대회나 콩쿠르 같은 목표도 없이,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피아노는 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우리가 진정 지켜줘야 할 것은 아이들의 ‘지금’이다. 


30분의 자유시간에 환하게 웃는 아이들처럼, 삶의 작은 여유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진정한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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