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결핍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탄식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계로 둘러싸여 있다. 카카오톡 단체방이 수십 개이고, 점심 약속은 매일 있으며, 커피 한 잔을 두고 나누는 대화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관계의 풍요’ 속에 우리는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
회사에는 수많은 선이 있다. 직급과 직급 사이의 선, 부서와 부서 사이의 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의 선들. 우리는 매일 이 선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살아간다. 며칠 전의 일이다.
큰 회사 행사를 앞두고 많은 양의 수제 과자를 준비해야 했다. 미나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었고, 수진이와 은지 씨도 틈틈이 거들어주었다. 팀장님도 포장을 도와주셨고, 지영이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분주한 연말, 모두가 바쁜 시기였기에 그들의 도움이 더욱 고마웠다.
그러나 그날,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평소 ‘우리는 친하잖아’라며 생각했던 이들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섭섭했다. 업무 이야기나 사적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은 이날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통계청의 2023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의 대인관계 만족도가 2019년 대비 12.3% 하락했으며, 특히 20-30대의 경우 "직장 내 인간관계가 피상적이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71.2%에 달했다. 우리는 더 많은 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연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이런 관계의 허상을 더욱 강화한다. 끊임없는 메시지와 이모티콘의 교환이 진정한 소통으로 착각되는 시대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MZ세대의 직장 내 인간관계 특성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8%가 "업무 외 동료와의 교류를 최소화하고 싶다."라고 답했으며, 이는 2018년 조사 대비 23.4% 증가한 수치다. 표면적인 리액션이 진심 어린 반응을 대체하고, '읽씹'과 '안읽씹'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이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든다.
특히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잘 나타난다. 점심 약속과 커피 채팅이 만드는 일시적 친밀감, 업무적 필요가 만드는 표면적 관계는 진짜 위기의 순간에 그 실체가 드러난다. 처음에는 서운함이 밀려온다. 점심시간마다 함께 웃으며 나누었던 대화들, 커피 한 잔을 두고 털어놓았던 고민이 모두 가식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먼저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내 업무도 바쁜데 타인의 업무를 뒤치다꺼리하면 안 된다. 고맙다는 말로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만, 현실은 내 똥줄이 타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명확한 경계도 필요하다. 업무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구분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냉정함이 아닌, 서로를 위한 배려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거리를 조절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솔직한 감정 표현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속담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에게는 '나' 메시지를 활용해 감정을 표현하되,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한 적절한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회사에서의 관계는 마치 모래성과 같다. 단단해 보이지만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때로는 그저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관계를 의심하고 방어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인식은 더 건강하고 현실적인 관계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진정한 관계는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순간 진심 어린 소통이 가능한 상태다.
이는 마치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 너무 가까이서 과도하게 돌보면 식물이 숨 막혀 죽을 수 있고, 너무 멀리서 방치하면 시들어버릴 수 있다. 적절한 거리에서 필요한 만큼의 관심과 돌봄을 주는 것,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관계의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