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빠가 인공 방광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간병하던 엄마는,
같은 입원실에 있던 분들과 금세 친해져서, 이후로도 종종 연락하며 지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
병실에서 함께 지냈던 분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반가움의 인사가 오간 후, 엄마는 아빠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위로의 말이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긴 대화 후 전화를 끊은 엄마에게, 그분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완치 판정을 받아 현재는 정기 검사를 받으며 지낸다고 하였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섬망이 오기 전까지, 완치의 기적을 꿈꾸던 아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왜 낫지 못했을까?
급작스레 말기암이 되어서 그랬을까?
인공 방광 수술 후 내가 좀 더 꼼꼼히 아빠를 살피고 간호했더라면,
아빠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을까?
방광을 떼어내고 소장의 일부를 잘라 인공 방광으로 만드는 수술.
2020년 7월 수술일.
엄마와 나, 동생이 함께 대기실에 있었다.
아빠의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수술 중 응급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6시간 후, 의사가 나와 인공 방광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고 하였다(수술 전에는 아빠 상태가 좋지 않아, 인공 방광을 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했었다).
입원실에서 본 아빠의 얼굴은, 그사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병실에 보호자는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엄마, 나, 동생이 교대로 병원에 머물렀다.
어려운 수술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원실에 있으면서 정말 큰 수술이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아빠는 수술 부위보다 다리를 더 아파했다. 1.5리터 생수병으로 양쪽 종아리를 문질러주었다. 병 안의 물이 미지근한 온도가 되면 다시 통증이 올라온다고 했다. 차가운 페트병으로 교체 후, 종아리 밑으로 계속 굴리며 마사지했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괴로워하였다. 평소 잘 참는 아빠였기에,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뜻이어서 너무 걱정되었다. 신경과 협진을 받았지만, 원인을 찾진 못하였다.
인공 방광 수술을 하면 곱(찌꺼기, 부유물)이라는 것이 나온다. 장에서 떨어진 찌꺼기가 소변줄을 타고 계속 내려온다. 곱이 쌓여 막히지 않도록, 소변 주머니와 연결된 줄을 계속 비틀고 주물러줘야 한다. 멈추면 어느새 곱이 쌓여 소변이 내려가지 않게 된다. 그럴 때는 얼른 의료진을 불러야 한다.
쉬지 않고 줄을 비틀고 주무르다 보니, 손에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났다.
병원 생활의 낯섦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았던 고단한 보름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퇴원일이 되었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병원으로부터의 해방이라 아빠도, 우리도 기뻐했다.
퇴원 후 아빠는 집에서 관리의 시간을 보냈다.
소장으로 만들어진 인공 방광이, 방광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2~3시간에 한 번씩 배뇨 훈련을 해야 했다.
새벽에도 알람을 맞춰놓고 화장실에 갔다.
아빠는 힘들어하면서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매일 성실히 노력했다.
8월의 어느 날.
밤새 열이 나고 토하던 아빠를 데리고 엄마가 응급실로 갔다. 코로나라 함께 갈 수 없던 나는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걱정되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열이 나서 병원을 갔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으로 우동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아빠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응급실 의사가 가족들 모두 부르래. 얼른 와"
엄마가 울며 말했다.
먹던 면이 목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