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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Sep 22. 2019

나를 슬프게 하는 말들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듣듯

중학교 때인가, Skeeter Davis 의 노래 The End Of The World 를 처음 배웠을 때,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가사가 너무나 와 닿던 기억이다. 나는 이렇게 슬픈데 세상의 새들은 여전히 지저귀고, 파도는 치고, 내 심장은 이렇게 뛰고 눈물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마음.

물론 그 당시의 내가 뭐 딱히 이별을 안 것도 아니고, 그렇게 슬픈 일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내 감정과 세상이 전혀 공명하지 않는 상황이 더 싫었던 것은 늘 가운데 아이라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심리적 배경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울하면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기분을 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이열치열, 내 기분에 맞는 음악을 찾아 듣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늘 병원에서 정확한 병의 처방전을 쓰듯이, 정확이 어떤 이유로 정확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의 정체가 뭔지 파악하려고 애쓴다. 이따금 슬픔인 줄 알았는데 분노였다든가,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서운했던 거였든가 그렇게 뜻밖의 감정의 이름을 파악하면 적어두고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감정을 찾아내는 방법 중에는 물론 가만히 속을 잠잠히 가라앉히고 실제로 '느껴보는' 방법도 있지만 Button이 눌린다고도 하는데, trigger word 날카로운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을 주목했다가 찬찬히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내가 슬프고 무섭게 생각하는 단어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l‪et/leave (someone) hung out to dry.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누군가를 혼자 대면하게 내버려두는 것, 설명도 없이 마냥 혼자 타들어가게 하는걸 말한다. 빨랫줄에 걸쳐진 북어 대가리처럼 비썩 말라 비틀어져가는 모습이 그려져서 마음이 아려오는 말. 널어 말린다니...

Needy 

Need는 그냥 단순히 필요라는 말인데 누군가를 가리켜 쟤는 needy하다,고 하면, 징징거리며 늘상 관심과 보살핌을 요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끈적거리는 사람이랄까. 혹시라도 누가 나를 질척인다 생각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taint

큰 것도 아니라 조그만 뭔가 지워지지 않을 더러움/감염/수치를 주는 사건이나 흠으로 인해 전부를 돌이키기 어렵게 흐려놓은 것. Damage나 Ruin처럼 눈에 띄게 망가져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빠지지 않는’ 얼룩, 때 처럼, 첫단추를 잘못끼운 것처럼, 아무리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비비고 비비면서 아무리 애써도, 앞으로 아무리 잘하고 잘 되어도 돌려놓을 수 없는 부분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주는 느낌. 


언젠가 나의 자매들이 모여 얘기하는 데, 우리가 각각 싫어하는 영화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흥미롭던 기억이다. 나는 주로 영화 Fargo처럼 조그만 실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는 영화를 싫어하고, 언니는 누군가가 억울해지는 영화를 싫어하고,  동생은 누군가가 배신당하는 영화를 싫어하는 식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싫어서 나는 범죄물 자체를 싫어한다만.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사실 무슨 색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것보다, 무슨 색 싫어하세요? 무슨 음식 싫어하세요? 하고 묻는 것이 아마 더 적절할 것도 같다.


내가 그런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어느 정도는 control Freak 통제 강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내가 손 볼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 항상 변수를 최소화하고 누군가가 문제를 만들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생각한다. 얼핏 이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지만, 평상시에 이렇게 되지 않게 하기위해 항상 긴장을 하고 살아가며, 그게 안될 때 내가 힘들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사실 삶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면 결과를 기다려야 하고, 서류를 접수하고 나면 처리를 기다려야 하고, 메일을 보내면 받기를 기다려야 한다. 해가 밝기를 기다려야 하고, 오피스가 문을 열기를 기다려야 하고, 물건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 등, 우리 일상은 많은 기다림으로 채워져있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저 두 단어는 일단 설명이 된다. 누군가 나를 내버려 두고 그저 기다리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뭔가 나의 아차 작은 실수로 큰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면, Needy, 즉 내가 늘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비추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별명이 미련 곰뚱딴지일만큼 남에게 정신적, 물질적, 금전적으로 기대지 않으며 살려고 노력하는 내가 지레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바로, control freak이 된 근본 원인, 세상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혹여 누구라도 나의 약점을 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향해서, 나는 아무도 필요없어! 하고, 넘어져 까진 무릎에 빨간약을 바르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영어 단어를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어든 스페니쉬든, 수화든 언어를 하나 더 안다는 것은 분명 세계가 넓어지는 일이다. 또 다른 우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많은 단어를 알기보다 한 단어라도 깊은 뜻을 새겨 자기 것으로 만들어두는 것은 세계가 깊어지는 일이다. 근사하고 남들도 많이 쓰는 그럴싸한 흔한 말 보다, 나만의 단어들을 서랍에 잘 빤 양말들처럼 차곡차곡 개켜 담아두는 것은 각별하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영어로 벌거벗었다는 말을 in Birthday suit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기는 벌거벗고 세상에 왔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라고 어느 가수는 노래했지만, 죽을 때는 사실 다시 온 그대로 돌아간다. 당연하지만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나이는 한참 더 먹은 분들이 볼 때는 아직 젊다고 볼 수도 있고, 젊은 사람들이 보면 제법 먹었다고 볼 수도 있는, 그야말로 '중'년의 나이지만, 곧 죽을 나이라고 생각되는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한 해가 다르게 몸은 삐그덕 거리기 시작하고, 기침을 한 번 해도, 허리가 아프고 소화만 안되어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살이 빠진다고 마냥 좋아할 나이고 아니고, 이제는 뒷모습들만 찍어놔도 나이가 보이는 나이다. 

아동바동해도 세상이 내 마음대로가 아닌 것은 애저녁에 깨달았다. 그저 그 안에서 나를 다스리며 사는 법을 배우려 애쓸 뿐이다. control freak이라고 해봐야 나 자신 하나 콘트롤하기 급급한 것이다.


잘 살아야지. 하루하루 잠잠하게 잘 살아야지,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잘 살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나의 감정의 이름을 더듬더듬 찾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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