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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Oct 27. 2019

일종의 프롤로그

'알래스카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시작하기 앞서

(글자 그대로) 웃고 즐기는 사이에 내가 알래스카에 산 지도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내가 알래스카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곧잘, 어떻게 ‘그런 곳’(어떤 곳?)에 사느냐, 고 말하기도 하고 (좀 무례하다), ‘그런 곳에’ 사람이 살아요?라고 눈을 둥그렇게 뜨기도 하고 (무례하다), 짐짓 어이구 추워, 어깨를 움츠리며 아닌 연기를 펼치기도 한다 (매우 무례하다). 알래스카에 산다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는 물론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한 때 회자하던, 특정 장소의 이미지와 현실을 풍자한 방식대로라면,


나랑 알래스카 갈래?

-험난한 여행 끝에 도착하면 바로 얼어 죽을 듯

-아침마다 개썰매 타고 물 길으러 가고 사냥으로 연명할 듯

-저녁이면 호롱불에 에스키모들하고 가죽옷 손질할 듯


나랑 오로라 보러 갈래?


-인스타 스타 인생 샷 예감

-우주의 기운을 받고 만사형통할 듯

-자연과 하나가 되어 야생동물들과 소통 가능할 듯


'알래스카'라는 말에 사람들이 떠 올리는 이미지 (사실은 북극임)
페어뱅크스의 가을 (8월 말 -10월 초)

그러나, 사실 나는 말을 직역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주로 어리둥절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어디서든, 어떻게든, 그냥 밥 벌어먹으면서 열심히 사는 거 아닌가? 영이는 왜 서울‘같은데’ 살고 철수는 왜 원주 ‘같은데’ 살죠? ‘왜’ 순이는 방배동, 동수는 신수동에 살죠? 충주에는 사람이 ‘어떻게’ 살고 마포에는 ‘어떻게’ 살죠?


얼마 전 바이칼 호수에서 수제 스케이트를 타고 생활하는 할머니 동영상이 오래 떠돌았는데, 사실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아무리 선의에서라도 자신의 삶을 ‘구경거리’로 여기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 할머니는 심심하던 차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좋았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삶의 무엇이 그렇게 ‘신기’한지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알래스카를 방송에서 봤고, 신비하고 아름답더라는 얘기를 누가 꺼내도, 알래스카에 어떻게 사냐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묘하다.


우주는 위아래가 없는데도, 호주를 중심으로 ‘거꾸로’ 그려져 있는, 지극히 정상인 지구전도를 본 북반구 사람들은 꽤 당황한다고 한다.

보는 시점을 누가 정하는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잘 모르는 것을 만나면 더 알아보려고 하기보다 그저‘신기’ 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할 줄 모르고 자신과 ‘다른’ 삶을 ‘틀리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편견이란 흔히 의도적인 악감정이 아니라 그렇게 사소한 무신경함에서 시작된다. 알래스카 깃발에는 고작 파란 바탕에 노랑 별로 큰 곰‘별자리’가 그려져 있지만 캘리포니아는 주 깃발에 곰이 떡하니 들어있는데도  아무도‘캘리포니아에 가면 길에 곰이 막 다니냐’고 묻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국의‘요즘 뜨는 집’이란 것들은 번번이, 오픈하고 얼마간 몰려온 사람들이 인증숏을 다 찍으면 발길이 뚝 끊겨 문 닫기의 반복이라는 분석을 보았다. ‘미슐랭 효과’에 대한 글도 보았다. 애써 찾아간 곳이 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왕 돈과 에너지를 쓴 것에 나쁜 평을 쓰지 못하는 효과를 말한다.   

사람들이 애초에 원하는 것은, 사진 찍어 SNS로 자랑하고 다시 덩달아 막연히 동경하는 그 많은 멋진 장소나 음식들이 아니라 ‘나도 남들을 원하게 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왔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사람들 생각 속의 전형적인 어떤 ‘이미지’를 팔고, 또 그 환상을 사고, 그로 인해 서로 허상을 좇고 쫓으며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사회. 관광지에서 찍어온 사진은 마치 엽서나 되는 듯이 천편일률적이고, 누군가가 나 여기 가 봤다고 말하면, 너도나도 자기의 엇비슷한 인증샷을 꺼내 들어야 뒤처지고 무시당하지 않는,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 책의 인용구나 요약을 듣거나 읽고는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나는 좀 지쳐있었던 가 보다.

Last straw마지막 지푸라기라는 말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낙타의 등에 짚을 너무 많이 얹다 보면 마지막 한 가닥 넘치는 무게가 결국 나귀의 등을 부러뜨릴 수 있다는 속담에서, 마침내 버티기 힘들게 한 그 하나를 말한다.

무례는 바람처럼 겪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후쿠시마 방사능처럼 축적이 된다. 그래서 나도 알래스카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편견으로 인해 지레 날카로워지는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극히 일부분을 가지고 삶 전반이 끊임없이 판단되고 있다면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 항변해본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사랑으로 열심히 키우고 계신 분들이나,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이슈로 직접 부당함을 겪고 있는 분들이, 얼핏 생각 없이 무례한 사람들에게 보기는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는 수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대의 한 마디가 그날 나귀의 등을 부러뜨린 딱 한 개 더의 실낱같은 지푸라기 딱 한 가닥이 될 수 있고, 아무리 가벼워도 짚은 짚이지 절대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알래스카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얀 동토의 땅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모든 이야기는 결국 개인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삶에 밀접한 것에는 애증의 감정이 있고, 다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부분은 외면하고 없는 체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을 시야에서 잃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알래스카 원주민이 쓰는 ulu울루라는 날이 곡선인 전통적인 칼이 있다.

손잡이에 끝에 수평으로 칼이 달린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스케이트처럼 밑이 둥근 날카로운 날 위에 손잡이가 달린, 피자 자르는 양손잡이 둥근 칼의 한 손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칼을 쥐면 주먹에 칼이 달린 듯한 모양새가 되어, 야생동물이나 생선의 살을 쓱쓱 발라내거나 어깨의 힘을 실어 뼈와 힘줄을 끊어내기도 좋고, 채집한 채소들을 그에 맞는 바닥이 둥근 도마에 찹찹 다져내기도 좋다. 앵커리지에는 울루 공방이 있어서 원주민이 햇볕에 말린 무스의 뿔이나 뼈 손잡이를 달아 전통방식으로 제대로 만든 원주민의 제품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울루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갓 잡아 온 연어의 내장을 도려내고 살을 발라내고 질긴 가시는 하나하나 뽑아내고 팡팡 토막 쳐내듯 알래스카를 실제로 ‘먹을만하게’ 만들어 볼 셈이다. 혹, 왜 하필이면 한참 추울 때 추운 곳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지금이 바로 오로라를 보기에 딱 맞는 시기이기도 해서다.


현실을 보여준다면서, 금방 건져 올린 푸득이는 산 연어를 들이대고 있던 나에게, 알래스카 편람을 써서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하고 깔끔한 조언도, 조목조목 부분을 짚어주는 조언도, 전체 구조를 뜯어버리자는 조언도, 모두 내게는 이 글뿐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의 시점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에서 감사한다.

 

모쪼록, 겉핥기로 잠깐 다녀간 알래스카 여행객이 쓴 알래스카 여행을 위한 안내서도, 알래스카 편람도 아니고, 여러분이 다 읽고 나면 불쏘시개로 써서, 올리브기름을 바른 알래스칸 연어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기서 잠깐 안내 말씀


알래스카는 좀 크다.


알래스카가 미국의 49번째 주로 영입될 때까지는 ‘미국에서 가장 큰 주’였던 텍사스주는, 찌질하게도 그 알량한 타이틀을 잃는 게 싫어서 알래스카를 반으로 갈라서 들이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관계자가 답하길,

 “그러면 느이는 그나마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로 큰 주가 된단다’

알래스카 반쪽이 그 큰 텍사스보다 큰 것이었다. 둔 둔.


나는 검색은 무조건 구글로 하는데도, 이 글을 준비하면서 팩트체크 차원에서 ‘한국 크기’를 검색했다가 정보를 못 얻은 것은 물론 못 볼 것(?)을 봤고, 다시 Korea size (korea'n' size 아님)로 검색을 해야 했던 웃지 못할 실화가 있지만, 한국 '영토' 크기의 나라 사람들이 알래스카에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래스카의 크기를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알래스카에 산다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과 축적이 다른 다른 우주에 사는 것과 같으니까.

해서, 고민하다가 최대한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잠깐, 이게 왜 시작하다 말고 덧붙여서 슬쩍 나오냐는 아주 좋은 질문에 대한 답변 :  따로 숫자 늘어놓으면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아서라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허심탄회.

영어로 잠시만 참아줘,를, bear with me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bear는 당연히 곰이 아니라 인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금 참아줘요. 이렇게 따라가면 틀림없이 곰도 나오니까. 약속!

Bear with me, please. Then, you definitely will be with bears, too. I promise.


뭔가가 얼마만큼 큰가 하는 것은 살면서 경험을 해 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 같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는 줄 아는 아는 것과 모르는 줄 아는 모르는 것과 모르는 줄도 모르고 있는 모르는 것과 아는 걸 모르고 있지만 아는 것이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토닥토닥)


게다가, 메르카토르 도법이 어쩌구 저쩌구 해서, 지도상에 나타나는 것과 실제 크기차이는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숫자'만'으로는 감이 와 닿지 않겠지만 숫자를 내밀 수밖에 없다.


일단, 알래스카는 미국 본토 크기의 1/3 크기이며, 북단의 배로우에서 남단 끝 섬까지 남북 길이는 2,253km이다.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길이는 965Km, 폭은 193km에 불과), 면적으로는 알래스카는 한국의 17배 크기이다.

따라서, 간만에 LA 출장 오면서 뉴욕 사는 사람한테, ‘나 이번에 미국 가는데 시간 나면 한 번 와, 얼굴 한번 보게’,라고 말하는 사람들, 모스크바에 삼박사일 다녀와서 ‘내가 이번에 러시아 (대략 1700만㎢, 한국은 10만㎢)를 둘러보고 와서 아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 ‘알래스카(170만 ㎢)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해산물은 싸겠다.’, 고 말하는, 분명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고 책도 많이 읽었을 한국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위도 37.56° N의 서울과 위도 33.48° N 제주도 간, 즉, 위도 4 정도 규모의 체감밖에 안 지녔기 때문에 위도 18 범주를 차지하는 알래스카의 크기가 와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나는 이래 봬도 상당히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 위도 4도 범주안에 드는 크기 안에서, 서울에서 불과 몇 시간 거리의 마산 사람에게 지하철이 없으면 뭘 타고 다니냐는 말을 해서 ‘고래 타고 다닌다 왜!’ 소리 나오게 하는 것은 좀 안타깝긴 하지만.


*크기와 더불어 건조하고 바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 역시 알래스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이라서 자꾸 나오게 되니, 기억력이 뛰어나거나 필기를 잘하는 모범적인 분들은 예습 삼아 그 점 또한 잘 적어두기로 하고, (분필 가루를 털며) 이제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Now, really, on with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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