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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Oct 27. 2019

알래스카 겨울 이야기(1)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우리 집에는 냉장고 한 구석에서 늘 잠자고 있는 sourdough사워도우 스타터 한 병이 있다.


poolish풀리쉬라고도 하는 이 스타터는 이스트로 밀가루를 질척하게 발효해 병에 담아 놓은 것이다. 요즘에는 마른 이스트 가루가 있어서 언제든지 빵을 만들 수 있지만, 오래전에는 생 이스트를 이런 식으로 보관했고, 한동안 빵을 굽지 않게 되면 물과 밀가루를 조금씩 더해줘서 살려 놓아야 한다.


빵 만들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워도우 스타터만 있으면 초기 알래스카 정착민처럼, 따로 정확한 계량 없이도 시큼하고도 고소한 사워도우 브레드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알래스카 인들은 자칭 ‘사워 도우’라는 별명을 자부심 있게 달고 있다.

그 이름이 붙은 식당,  석유업체, 이사업체 등도 있다.

사워도우 빵의 매력을 알고 있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자칭 ‘시큼한 빵’이라니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 유래는 골드러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 사냥꾼들은 남녀노소 하나같이 이 ‘사워도우’ 반죽을 품에 하나씩 품고 왔는데, 언제 어디서나 거기에 밀가루만 더하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flap jack플랩 잭이라는 일종의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고, 그렇게 사냥이나 채집이 다른 곳보다 어려웠을 척박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워도우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날 저녁에 미리 사워도우 스타터를 꺼내어 밀가루를 한 두 컵 정도 넣어 휘휘 저어서 따뜻한 곳에 두고 자면 되는데, 회색으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반죽에서 금세 달큼한 이스트 내가 올라오면 배뱅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갑고, 나는 내일 아침에는 맛있는 고등어, 아니 사워도우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 드는 마음이 설레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알래스카주의 서부 옆구리로부터 들어오는 유콘강을 따라  여름에는 배로, 겨울에는 개썰매나 스노우 슈즈를 신고 알래스카 중앙 골짜기에 있는 낯선 땅 여기 페어뱅크스로 무작정 상경, 아니 상 알래스카를 하는 용감한 초기 정착민들을 그려보게 된다.

 

금맥이 있는 곳에 각자 조금씩 할당받은 꽁꽁 언 겨울 땅 위에 밤새 불을 지펴놓고, 아침이 되면 그 녹은 자리를 열심히 파고, 또 밤이면 불을 지펴놓고 지친 몸을 뉘었을 그들은 아마도 나처럼 아침에 먹기 위해 밀가루를 넣어 뒤적여 놓은 사워도우 스타터를 품고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바람 없는 알래스카에서는 연기가 전혀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 구름기둥처럼 얼어붙기 때문에 인적이나 조난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도 한다. 산재한 구름기둥 낱낱이 하나씩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니!

혹시 군대 다녀온 분들은, 언 땅 파기가 어렵다는 것을 ‘좀’ 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위도 45 이상의 추위에서는 겨울에 땅을 판다는 것은 중장비를 이용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스티븐 킹의 고향이자 그의 많은 소설의 배경인 미 북동부의 메인주만 해도, 공동묘지에서는 매년 한겨울에 사람이 얼마나 죽을지를 대충 예상해놓고 가을에 미리 할당량을 파놓고 기다린다는 얘기가 있다. 좀 암울한 예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닭집에서는 아침마다 그날 팔릴만한 양의 닭을 예측해 해동한다는데 그것하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라고 쓰고 보니 얘기가 더 이상해져 버렸다)


혹, 금은 발이 달린 것이 아닌데 그새를 못 참고 겨울에도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혹 금은 참을성이 많아도 겨울에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실제로, 금에 눈이 멀어 일확천금을 꿈꾸고 들어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캐는 대로 마을에 와서 술과 유흥에 써 버려서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고, 중간상인이나 기업형만 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돈 놓고 돈 먹기은 있는 사람들이 버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하다.


알래스카에는 따로 녹여 채취하지 않아도 그대로 손에 쥘 수 있는 형태의 사금도 많았다. 지금도 박물관에 가면 냇가에서 ‘주운’ 녹두만 한 금 알갱이들과 크게는 손톱만 한 금덩어리 (이런 금덩어리를 nugget이라고 하는데 너겟은 그저‘덩어리’라는 말이라서 다른 데도 많이 쓰이는데, 기타‘다른’ 너겟은 다음 편 ‘무스와 산책을’ 참조) 들을 따로 세공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 붙여 만든 모양의 장신구들이 전시된 걸 볼 수 있다.


사금을 채취하는데 쓰는 세숫대야 같은 도구를 pan팬이라고 하고, 채취 작업을 panning패닝이라고 한다. 언젠가 도로여행 중에, lower 48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나머지 48개 본토에 있는 주를 lower 48이라고 부른다) 옛 금광 주변에서 이른바 금 채취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짜 놓은 틀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물에 잠긴 금이 섞인 모래를 팬에 한 움큼 담아서 무게를 이용해서 살살 흔들고 흔들고 따라버리고 또 흔들고 흔들고 (무한 반복)해서 금을 채취하고, 모은 것은 가져갈 수 있게 해 주는 건데, 이참에 팔자를 바꾸어보려나 싶어 팔이 떨어져라고 흔들고 있노라니 지켜보기가 어쩐지 미안해졌는지 주인 양반이 그게 진짜 금이 아니라 fool’s gold바보의 금이라고도 부르는, 화학기호 FeS2의 황철석이라는 것을 알려준 적이 있다. (설마 그렇게  쉽게 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fool이죠)



그러나!

지금도 알래스카에서는 하루 50불을 내고 들어가면 정해진 지역 안 어디에서나 양말 빠는 그 대야같이 생긴 pan 하나로 ‘진짜’ 금을 건져 볼 수 있는 관광이 있다! 확률이 어떤지는 괜히 기분 울적한 날 지하철 계단 한구석에 앉아 500원짜리 동전으로 복권 긁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래도 놀면 뭐 해 오세요 알래스카

지금도 어디 ‘한적한 곳에’ 금이 많이 있지만, 자연보호로 채취가 금지된 곳이 많다고도 한다. 한때는 바닷가에 금이 그냥 굴러다녔다고 하지만 말이다. 얼른 안 오고 뭐 하세요 알래스카


초기 개척민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 개척사 초기에 각 유럽국 이민들이 자리를 잡을 때, 희한하게 자기들 나라와 비슷한 나라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누구라도 따스한 기후의 남부/서부에 자리 잡았을 것 같아도, 북유럽 사람들은 미국 북부에, 따뜻한 스페인 사람들과 남프랑스 사람들은 미 남부에 자리 잡았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은 잘 알려졌지만, 일본이 유일하게 '점령'했던 미 영토는 알래스카의‘키스카’와‘아투’라는 섬이었듯이, (별다른 일 없이 오차즈케나 만들어 먹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영토는 지켜야 해서 몰아내는데 기후와 접근성 등으로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섬나라 일본은 하와이도 그렇고 알래스카의 섬들도 그렇고 꼭 섬들을 먼저 먹으려고 했고, 현재도 하와이를 가보면 거의 일본인가 싶다.


한국인들은 사실 초기 미국 이민이 별로 없어서 한마디로 결론 내릴 수 없지만, 알래스카가 일종의 조금 큰 ‘반도’라서 그런지 알래스카는 일본 관광객은 많아도 이민은 한국분들이 더 많다! (유레카!)

하지만,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민을 시작해서 퍼져 나간 걸 보면 한국인들의 이상은 그저‘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가 아닐까 싶긴 하다. 역사물을 읽어보면 다른 동양인은 미국 초기 개척기에도 많이 왔더구만, 한국인들은 아무튼 한반도를 떠나면 당장 죽기라도 할 듯이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라서 남의 나라 침략 안 한 건 좋은데, 문호도 죽어라고 안 열고 이민도 안 하다니, 석유도 없고 공룡알 하나 안 나오는 거로 봐서 공룡조차 안 찾은 한반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꽁당보리밥이나 먹고 있는 게 그렇게 좋았다는 말인가.

가만, 결국 이것도 다 집‘밥’ 때문인가. (망연자실)

사진은 특정집밥과 연관이 없습니다.



한국의 구황작물이나 러시아의 보르쉬 수프,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콘브레드처럼 각 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시간을 견뎌 내게 해 준 일종의 soul food가 있게 마련인데, 알래스카 개척기의 척박한 환경에서 견디게 해 준 사워도우는, 늘 얼거나 쉬어 죽지 않도록 소중히 지켜야 했던, 그러나 혹 자칫 사망하기라도 하면 친절한 이웃에게 살짝 꾸어 무궁무진 살려낼 수도 있었던 점에서 마치 한국의 불씨와도 같고, 똑같이 밀가루와 이스트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만들 때의 습도, 온도와 손맛(!) 등에 따라 집집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다고 하니 한국의 된장 같기도 하다.    


물론 살다 보면, 한국의 닭고기처럼 찢어지는 밀크 식빵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씹을수록 고소하고 쫄깃한 사워도우 빵을 만들거나 먹을 때마다, 나도 마치 이 거대한 땅의 역사의 일부라도 된 듯 자부심이 생기곤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야 했던 것은 사실 자연발생도 잦은 불이 아니라 사워도우가 아닐까.

역시 빵은 진리요 사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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