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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Nov 16. 2019

싫음과 미움과 증오 사이

Why Can't We Be Friends?


최근에 유태인의 암울한 역사가 녹아 있는 Ludmila Ulitskaya의 소설 <Daniel Stein, Interpreter>을 읽고, 연달아, 국내외의 종교적 정치적 분열로 골치 아픈 아일랜드 작가 Anna Burns의 맨부커 상 수상작 <Milkman>을 읽고 나니 정말이지 우리는 왜 Why Can't We Be Friends? 다 친구로 살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우울감이 든다. (모두 저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읽도록 하자)

반 우스개 소리로 아무리 트위터의 주된 정서가 증오라고 해도, 정말이지 매일같이 사람들이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 하다. 듣자하니 거짓된 포장으로 서로서로 부러워 하면서 불행해져가는 인스타 정서도, 뭔가 있어보이는 것으로 인맥을 쌓아가는 페북 정서도 그닥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 모두가 우리 모두의 실제(?!) 세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사전적으로는 hate가 싫다,는 말로 되어있지만, 그냥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은 hate라기 보다는 don't like, dislike에 불과하다. 고수가 싫고, 양고기가 싫고, 부먹과 비냉이 싫은 것은 dislike이다. 그냥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부먹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비냉을 먹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물냉을 먹게 할 때 거기서 hatrted증오가 싹튼다.

 

물론, 사람은 당연히 호불호가 있으니, 마음에 안드는 것도 있고, 확실히 거부의사say no를 표명해야 할 때가 온다. put one's foot down 발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반드시 이것만은 내 의견을 확실히 표현한다는 말이고,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환경 또한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싫어한다는 말에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degree정도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인종차별이나 부자들의 세금감면 같은 정책이 나와 그것이 마음에 안든다고 생각하는 것, '지지할 수 없다'는 의미 정도로는 disapprove를 쓸 수 있다.

그리고 내게 부당한 것이 가해졌을 때 거부를 하는 것은, reject, refuse거부  decline거절이다. 감정과 별개로 의사표명의 행동을 말한다.

여기서, 무엇을 부인한다고 할 때 쓰는 deny는 수동형으로 무엇이 금지된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rejection과 더불어 불합격 통보에도 쓰이므로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는 말이다. 아니면 아니지 이노무 대학이 나를 거부씩이나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불합격이라는 말도 기본적으로 그닥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나가, 내가 나의 알량한 권력, 힘, 파워, 영향력을 행사해서 내가 '싫은' 것을 금지하면 prohibit, forbid가 된다. 법으로 금지되는 것들에 쓰는 말이지만, 알고보면 더 무서운 반 농담으로 묵언의 동의 같은 것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평양냉면 식당에서 비냉을 시키면 안돼,라고 금지하는 것이다. 메뉴에 있는데도. 나는 내일 냉면 자체를 먹을 수 없는 곳으로 출국을 하고, 바빠서 그동안 냉면을 한번도 못 먹었으며, 나는 비빔냉면을 물냉면 보다 좋아하고, 오늘 비빔냉면 먹고 가지 않으면 2년은 먹을 수 없는데도, 그리고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때리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유명한, 먹을 수록 감칠맛이 자꾸 생각나는 슴슴한 국물로 유명한 평양냉면 집에서 엉뚱한 비냉을 시키는 순간! 갑분싸가 되면서,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뭘 모르는 사람을 향하는 비웃김, 깔봄, 이 된다. 미워하는 감정의 다른 형태이다. scorn, look down nose at, despise, snub다.

남의 사정이야 어떻든, 별 것도 아닌 걸로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look down one’s nose at이라는 말은 고개를 약간 제끼고 콧날을 따라 내리깔아보는, 깔보는 모양을 그린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참 시시하고 치사하다, 굳이 힘들게 그런 동작을 해가면서 깔아보려 하다니.


그리고, 그래서, 아 여기서는 비냉시키는 거 아니야, 물냉으로 주세요, 하고 내 주문을 누군가가 제멋대로 바꾸어버린다고 치면, 이제 내 안에는 그 물냉 신봉자에 대한 증오hatred가 싹트게 된다.


loathe, abhor이라는 동사는, 거의 육체적인 반응의 강렬한 증오의 감정을 보인다. ㅅ~~싫어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의 이름은, abhorence, repugnance, revulsion 이다. feeling abhorence, feeling repugnance. feeling revulsion이라고 하면 gut feeling처럼 몸이 굳어버릴 정도의 '순간의 강렬한 느낌'이다.  그냥 '어 나 그거 싫은데', 정도가 아니다.


반면, 일상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살아가는' 악의, 증오, 악감정, 적대감은 malice, enmity malevolence, hostility, resentment 다. 나에게 뭔가 직접적이고 일시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같이 놀기 싫고', 보기 싫은 것을 넘어, 그 감정을 에워싸고 있는 단단한 이슈가 있는 상태다. 어떤 집단이 애초에 갈라져 있게된, 정치적 종요적인 이슈이거나, 최대한을 가장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영 좁혀지지 않는 고질적인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들을 결국, 적enemy,혹 그를 넘어서서 숙적 nemesis 이라고 하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히 덕스럽고 선량(whatever that means)해서가 아니라 보통은 스스로 마음 편하려고 용서하고 이해버리는 일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미워하는 감정은, 사실 미워하는 감정 그 자체보다 일파만파 그로 인해 번져나가는 피해가 더 문제다.


bitterness는 글자 그대로 하면 씁쓸하다는 말인데, 한국어로의 씁쓸하다, 입맛이 쓰다는 말보다는 조금 더 강도가 있는 말이다. 비참함에 가까운 . 감정적인 쓰라림?, 자칫 칼을 가는 심정으로 이어지는 뭔가 억울한 매우 사적인 감정이다. 그렇게 상대방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hold/have ‘ill’will 악의를 품는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상대방이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자신과 마음이 같은 사람들끼리 싫은 사람들을 Shun피하고, 따돌리기 ostracize시작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에 안드는 '애들' 왕따나 시키고, 우우 몰려 다니면서 서로 미워하고, 공격하고, 싫어하고, 싫어하고 싫어하면서 우리는 구질구질하게 살아간다.


그냥 좋아하지 않음에서 미움에서 증오로 이어지는 감정들의 상당수는 좌절감 frustration때문일 것인 것을 안다.

공권력이든 정의(whatever that means)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그저 미워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망하기를 바라고, 급기야 죽기를 바란다.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사실 그냥 '눈 앞에서, 우리에게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말이지만, 정중하게 '그냥 죽으세요'라고 해맑게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게 죽이겠다는 말도 진짜로 죽으라는 말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죽이겠다는 것과 죽기를 바라는 것은 크게 다르다. 하지만 분명 죽으라는 것은 그냥 밉다는 것과도 다르다. 그 말은, 너 같은 것은 벌을 받아야 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있지 않아서, 받을 것 같지도 않아서 하는 말이다. 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내가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말하지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더러운 세상이니 그냥 죽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는 매우 공격적이고 능동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힘없고 수동적인 말이다.


하지만, 그 많은 미움과 증오의 감정의 단어들 끝에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한 단어 뿐이다.

hurt

미워함의 끝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다친다. 나든 너든, 그들이든.


no hate speech 운동이 있다. 본래는 인종이나 종교, 성집단 간의 혐오를 반대하는 것에서 나왔지만,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너도 나도 다들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을 마구 폄하하는 '발언'을 쏟아내지 말자는 것이다. 혹여 별로 친절하지 않은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말로 할 필요는 없다.

no hate의 부정적인 말 구조로 긍정적인 단어가 없을까 고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싫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분위기의 말, no hate 가 좋다.

아닌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아니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람을 파악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나 보다, 무엇을 싫어하나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듯, 미움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생존을 위해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사랑은 몰라도 누구나 미움이 뭔지는 알 것 같아서기도 하다.

아무도 사랑을 주지 않아 사랑 받은 적도 없고, 사랑을 줘도 사랑이 뭔지도 모르니 사랑을 준 적도 줄 줄도 모르고, 다시 사랑을 받은 적도 없고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도 모르고 돌고 도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하자고 말한들 소용이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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