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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은 멈춰 서라는 신호였다

by 석은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말을 꺼내기도 귀찮고, 주방에 서는 건 더 귀찮고, 해야 할 일 목록을 보는 순간 그냥 이불을 덮고 싶어지는 날.

그런 날이 올 때마다 나는 늘 똑같이 생각했다.

‘내가 또 이렇지.’
‘게으르다.’
‘왜 이렇게 작심삼일이야.’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실망의 말을 던졌다.



무기력은 나에게 늘 '나쁜 징조'였다.

감정이 지지부진해지고, 에너지가 흐르지 않고, 생산적인 것 하나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갈 때.

그럴 때 나는 내가 쓸모없어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고 온몸에 축축한 물기가 찬 듯 의욕이 도통 올라오지 않았다.

세탁기 돌린 걸 꺼내는 것도, 아이가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도, 남편의 농담에 반응하는 것도 다 귀찮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지.’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하루 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저녁 무렵,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이 한두 번이 아닌데... 나는 왜 이럴 때마다 나를 혼내기부터 할까?’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말 걸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내 안에, 무언가 말하고 싶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닐까?’

잠깐 조용히 앉아서 내 마음을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최근 며칠간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걸 시키고 있었다는 걸.

좋은 엄마로, 좋은 아내로, 좋은 동료로 살기 위해 나를 계속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쉬고 싶다는 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왔다.


무력감은 게으름의 징후가 아니라 쉼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잠깐 멈춰’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더, 더’ 하고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처음으로 무력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래."
"그래도 괜찮아."
"이 감정도 나한테 온 거니까."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그 말을 하고 나니 마음속 긴장이 풀어졌다.

마치 “이젠 좀 알겠지?” 하고 무력감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우리는 무기력해질 때 자신을 의심한다.

‘의욕이 없어진 나는 가치가 없을까?’
‘다시 예전처럼 활기차게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무력감은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기 내부의 호출’이었다.

그건 몸과 마음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경고였고, 가장 다정한 멈춤이었다.


요즘은 이렇게 말한다.

"은별아, 오늘 좀 힘들지?"
"그래, 그럼 그냥 멈추자."

그리고 차를 천천히 우려 마시고, 스마트폰은 멀리 밀어두고, 눈을 감고 숨을 쉰다.

그렇게 하루를 ‘멈추고 쉰’ 날에는 다음 날, 조금 더 깊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무력감은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연결하려는 방식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나는 이 감정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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