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감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슬픔이 올라오면 ‘괜찮은 척’, 화가 날 때는 ‘조용히 삼키기’, 억울할 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눌러두기.
감정은 흘러가야 사라진다는 말을 책에서는 많이 봤지만, 나는 흘러보내기보다 ‘가둬두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딱히 큰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엄마가 시킨 걸 한 번 더 물었을 뿐인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속이 확 뒤집혔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내 날카로운 말에 아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나도, 그 표정을 본 순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안다. 그 짜증은 아이 때문이 아니었다.
며칠째 이어진 피로, 쌓여가는 집안일, 누구도 묻지 않는 내 안부.
그 모든 감정들이 말 한마디로 터져 나왔던 거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스스로를 향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엄마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말투가 너무 날카로웠다."
"왜 그 순간 멈추지 못했을까."
생각은 많았지만, 감정은 여전히 안에 있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을 흘려보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거실에 조용히 앉았다.
햇살이 들고,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그 감정’을 꺼내어 보기로 했다.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지?'
'진짜 이유는 뭐였을까?'
'아이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화났었구나, 은별아.”
“서운했지. 힘들었고, 알아주지 않는 게 외로웠지.”
눈물이 났다.
울려고 운 게 아니라, 그 말을 하자마자 감정이 움직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정 하나를 꺼내어,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
이상하게도,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가슴이 조금 덜 답답했다.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감정은 붙잡을수록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건 느끼면 안 돼.’
‘좋은 사람이면 이런 감정 없어야 해.’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면, 감정은 흘러가지 못하고 내 안 어딘가에서 고인다.
그리고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발하거나, 몸으로 나타난다.
머리 아픔, 위장 장애, 혹은 이유 없이 무기력한 날들.
요즘은 감정이 오면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같이 있어줄게.”
“괜찮아, 느껴도 돼.”
“지금 네가 필요해서 온 거지?”
그러면 그 감정은 점점 진정된다.
화가 물러나고, 서운함이 말랑해지고, 눈물이 흘러나와도 치우지 않으니 어느 순간 마른다.
감정은 이해가 아니라 흐름으로 치유된다.
어디서 온 감정이든 그 자리에서 ‘존재를 허락받을 때’ 비로소 자기 일을 마치고 떠난다.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정을 ‘잘 느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게 나를 덜 어지럽게 하고, 덜 괴롭게 하고, 덜 외롭게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