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민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움찔했다.
그 말은 늘 ‘너무 민감해’,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그래’, ‘좀 둔해져야 살기 편해’ 라는 뉘앙스로 다가왔다.
어릴 때는 엄마가 부엌에서 조용히 내는 한숨 소리에도 방 안에서 잠을 설쳤다.
친구가 나를 힐끗 보고 평소보다 인사 소리가 작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이 감각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나는 타인의 감정과 말, 표정, 숨결 같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살아가는 데 꽤 피로한 특성이기도 했다.
감정을 빨리 캐치하고, 말에 숨은 뜻을 해석하려 애쓰고, 눈치를 보며 상상하고, 마음속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렸다.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치는 장면에서 나는 의미를 찾아내고, 가끔은 상처를 키웠다.
그래서 나는 예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덜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이 정도에서 그냥 넘기자.’
‘굳이 마음에 담지 말자.’
‘적당히 무시하자.’
노력도 해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덜 느끼려는 노력’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감정이 조금 달라 보였다.
밥 먹는 속도가 느리고, 눈이 자꾸 아래로 깔리고, 대답이 짧았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처음엔 "아니야" 하던 아이가 조금 있다가 말했다.
“학교에서 좀 서러웠어.”
아이 친구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받았고, 참다가 울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예민한 내가 아니었으면 이 아이 마음을 놓쳤을 수도 있었겠구나.’
예민함은 ‘별 거 아닌 일에 민감한 성격’이 아니라, ‘작은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누군가의 무표정 속에서 속마음을 알아채고, 공기 속에서 긴장을 감지하고, 말투에서 외로움을 들여다보는 힘.
그건 나에게 주어진 ‘다정한 안테나’였다.
내가 슬픔을 잘 알아채는 것도, 조금의 말투 변화에 민감한 것도, 아름다움을 쉽게 감동하는 것도, 모두 같은 뿌리에서 온 감각이었다.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예민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덕분에 우리가 놓치지 않고 살아왔어.”
“너 덕분에 누군가의 말 없는 마음도 알아챌 수 있었어.”
“네가 있어서 세상을 더 깊고,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었어.”
예민한 나를 싫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예민함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나를 무너지게 한 원인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내가 사랑하고 돌보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