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착한 아이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엄마가 기분이 안 좋으면 말수를 줄였고, 아빠가 무섭게 굴면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친구들이 화를 내면 먼저 사과했고, 선생님 앞에서는 늘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괜찮은 딸, 괜찮은 친구, 괜찮은 학생.
살면서 많은 역할을 맡았다. 며느리, 아내, 엄마, 동료, 친구, 선배, 후배 등
그 역할들 속에서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화가 나도 웃고, 속상해도 이해하고, 불편해도 배려하고.
“괜찮아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럴 수도 있죠.”
익숙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이 나를 점점 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건 많은 걸 참고 감추는 일이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상처받고도 ‘저 사람이 원래 그렇지 뭐’라고 넘겼다.
그러다 보면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내가 연기하는 나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내가 나를 외면한 건 타인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감정보다 그들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늘 한 박자 늦게 나를 들여다봤다.
상담 일을 시작한 뒤에도 그랬다.
누구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감정은 늘 한 칸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한 번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콱 막힌 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어요. 이해해요.”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자기 감정을 눌러버린 채 전문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착한 사람이라는 옷은 처음엔 나를 따뜻하게 감싸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옷은 점점 무거워졌다.
숨이 막힐 만큼.
그러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누구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왜 항상 내 욕망보다 타인의 기분이 먼저였을까?’
‘나는 나에게 착한 사람인가?’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제는 그 옷을 벗고 싶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친구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고 싶다.
실수해도 괜찮고, 싫다고 말할 수 있고, 무례한 사람에게 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걸 나도, 나 자신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자꾸만 축소하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이기적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굴 수도 있고, 상대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다.
그 모든 나도, 나의 일부다.
요즘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화가 나면 “지금은 좀 불편해요.”라고 말하고, 억울하면 “그건 나한테 상처였어요.”라고 털어놓는다.
누군가 나에게 “넌 진짜 착하다”고 말하면 웃으며 답한다.
“요즘은 그냥, 나로 살려고요.”
진짜 나로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나에게 진실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