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통합의 상징적 장면과 심리적 질서
자아 통합은 ‘하나의 자아’로 수렴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자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인식하고, 상호 간섭이 아닌 상호 공명을 이루는 ‘질서의 재구성’이다. 이 통합의 상징적 장면은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련의 반복된 시도, 조정, 실패, 인식, 그리고 조용한 수용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구성된다.
나는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문득 ‘지금 이 글을 쓰는 자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언어의 구조는 나현의 것이었고, 감정의 정조는 은별의 것이었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허락한 일상의 틀은 본캐가 마련했으며, 비유와 상징, 창조적 전환은 꼬마가 부여한 것이었다. 나는 놀랐다. 하나의 행위 안에 이토록 많은 자아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깨달음 이후로, 나는 자아 간의 상징적 균형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지휘자는 본캐였다. 책임을 지고 삶을 실현해야 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 은별은 현악기 파트처럼 섬세하고 정서적 여진이 긴 자아로, 감정의 깊이를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나현은 금관악기처럼 분명한 논리와 구조를 제공하며, 내적 시스템을 정비한다. 꼬마는 타악기다. 리듬과 전환, 가벼운 놀이와 창의성을 부여하며, 전체 흐름에 생명력을 더한다.
이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모든 자아가 배척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환대받는 것. 나는 은별의 우울을 외면하지 않고, 나현의 비판성을 억누르지 않으며, 꼬마의 가벼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본캐의 현실성을 지나치게 피곤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 결심은, 통합 이전에 먼저 온 환대였다.
내담자들과의 작업 속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작용했다. 어떤 이는 자신 안의 비판적인 자아를 악마처럼 여겼고, 또 어떤 이는 늘 아이처럼 살고 싶어 하는 자아를 철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 자아들이 등장한 배경을 함께 탐색하고, 그들이 생존을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는지를 자각하게 되면, 그 자아는 ‘문제’가 아니라 ‘보호자’로 바뀌었다.
나 역시 그러했다. 은별의 깊은 감정성은 때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치유적 직관을 제공했다. 나현의 냉정한 분석은 내 글을 차갑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체 흐름을 단단하게 구성하게 했다. 꼬마의 장난스러움은 때로 실수를 유도했지만, 가장 기발한 창조성을 부여했다. 본캐의 실용성과 현실 지향성은 감정을 무시하는 듯했지만, 결국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나는 종종 상징적 상상을 한다. 커다란 원탁에 이 네 자아가 앉아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다. 회의는 길고 복잡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의 결정이 나면 모두가 수긍하고 함께 움직인다. 이 상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다. 실재하는 내면의 질서다.
자아 통합은 이렇게 시작된다. ‘진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자아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 자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기능하면서도 전체로서 나를 살아가게 하는 내적 질서의 정립.
나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