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방송에 드라마란 어떤 의미일까?
새해 첫날 한 일간지에서 기사를 읽었다. 최근 MBC에서 있었던 '드라마 본부 PD'들의 피케팅을 두고, '제작 자율성'이란 관점에서 쓴 기사였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나왔다.
필자는 지난해 연말 2026년의 미디어 의제들을 열 가지로 정리하면서 공영방송 MBC 사장을 뽑는 일을 그중 하나로 꼽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입된 시민 추천위원들의 평가와 관련해, 어떤 기준에서 바라보면 좋을지 별도의 페이지에서 다뤘다. 어떻게 보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앞선 두 시도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2026년, 드라마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한국의 환경은 어떨까? 지상파 방송에 드라마란 어떤 의미일까?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드라마 본부 PD'들은 어떤 사람일까?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넷플릭스에 종속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위기를 우려한다. 이 글이 MBC라는 한 방송사의 문제로 협소하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하지만 위기의 원인과 구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시론으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뷰닷 구독자들에게 이 글이 쓸모 있게 다가가기를 소망한다.
괴물, 넷플릭스
2025년의 시점에서, 넷플릭스를 바라보면 아이러니하다. 스트리밍 서비스(OTT)인 넷플릭스가 TV를 닮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원래 TV의 방식인 '광고 모델'을 채용하고 있다. 두 번째, 전통적인 TV의 '편성 모델'을 도입하면서 예능 콘텐츠도 전면 배치한다. 세 번째, 스포츠 중계 등 라이브 권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네 번째, 제작사를 인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넷플릭스가 '절대 안 한다.'라고 말했던 것들이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TV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무서운 말이다. 공중파TV 입장에서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돈줄(프리미엄 광고)까지도 곧 빼앗기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가입자는 2024년 4분기 기준 3억 명을 돌파했다. 이 커다란 숫자가 주는 '규모의 경제' 효과는 엄청나다. 2025년 한 해 넷플릭스의 제작비는 180억 달러, 약 25조 원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국내 지상파 방송사 한 곳의 연간 총제작비는 겨우 천억 원을 웃도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가 안 되는 숫자다.
넷플릭스는 2016년 1월 7일 한국에 공식 상륙했다. 처음 투자한 한국 콘텐츠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였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에 제작 투자를 시작했다. 돈이 돌았다. 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성공 사례도 생겨났다. 넷플릭스는 아웃풋 딜(Output Deal, 제작사와 유통사 사이에 체결되는 독점 공급 계약) 형태로 작품을 늘렸다. 할리우드에 비교하면 싸지만 기존의 한국 콘텐츠 제작비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큰돈이 들어왔다. 지상파 TV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리즈물(16부작) 시장이 넷플릭스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제작사, 배우, 감독, 미술비, 스태프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하필이면 팬데믹 시기와 겹치면서 영화 시장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가 감독과 작가, 배우를 빨아들였다. 펀드로 투자하고 이익을 회수하던 기존의 영화 투자 방식은 철저히 망가졌다.
초대형 제작 스튜디오들이 만들어지고 초대형 작품이 나왔다.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한국 배우들도 넷플릭스 덕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뒤돌아 보니 남는 게 없었다.
첫 번째, 넷플릭스가 바이아웃(매절)하는 구조에서 한국에 남는 IP는 없었다. 스튜디오들은 제작비의 5%가량만 남길 뿐(처음에는 10% 가까이 됐다가 점점 줄었다)이었다. 흥행에 따른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없어서 만들면 만들수록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기준점이 넷플릭스에 맞춰지면서 콘텐츠의 다양성이 사라졌다. 최고의 배우, 최고의 작가, 최고의 감독이 동원되어야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세 번째, 결과적으로 과거 지속가능했던 기존의 드라마, 영화 제작 사이클이 완전히 무너졌다.
'드라마는 만들수록 적자'라는 현실이 찾아온 것이다. 10만 원이 넘었던 '스튜디오 드래곤'(KOSDAQ: 253450) 주가는 현재 42,500원 수준이다. 한때 상장을 꿈꿨던 SLL도 지독한 위기에 빠져있다.
드라마, 만들어야 할까?
지상파 방송은 드라마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MBC는 드라마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방송사 내부에서도 '적자가 나는 드라마를 꼭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제기가 나온다. 이유는 단순하다. 드라마가 전체 제작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만들어진 드라마 가운데 흑자를 내는 작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드라마를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같은 공중파이지만 MBC와 KBS는 예산 구조가 다르다.
KBS는 국민으로부터 시청료를 받는다. 그 돈이 연간 약 7천억 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MBC는 공익재단(비영리 특별법인)인 방송문화진흥회가 지배하는 공영방송이지만 단 한 푼도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않는다. 예산 전액을 스스로 벌어 충당한다. 오히려 매년 200억 원 가까운 돈을 방송발전기금 명목으로 국가에 낸다. 다시 말해 MBC는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면 곧바로 망하는 회사다.
그렇다면 MBC는 돈을 어디서 벌어들일까?
옛날에는 방송 광고를 통한 수입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MBC, KBS 등 지상파가 콘텐츠 시장을 장악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은 광고를 많이 빼앗겼다. 첫 번째, 사람들이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크게 늘어나면서 모바일 광고 시장이 급증했다. 두 번째,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TV를 닮아가는 넷플릭스가 고품질의 사용자 데이터로 무장하고 프리미엄 방송 광고까지 빼앗아간다. 그래서 지금은 MBC의 전체 수입 가운데 광고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안팎으로 쪼그라들었다. 점점 더 가파르게 빠지고 있다.
MBC는 나머지 돈을 어디서 벌까? 바로 콘텐츠 수입이다.
지상파 방송사는 IPTV으로부터 재송신료를 받는다. 이와 더불어 드라마, 예능, 뉴스 등 콘텐츠를 공급함으로써 OTT, 포털, 유튜브 등으로부터 그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드라마다. 말하자면, '어떤 드라마를 만드는 곳이냐?'가 그 방송사의 힘과 영향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된다. 재송신료 협상, 즉 콘텐츠 가치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필자는 여전히 지상파 방송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공익적이고 가장 가치 있는 콘텐츠 전송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재인 전파를 수신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복잡한 장비도 필요 없다. TV는 사람들의 시청 패턴을 분석해 고품질 콘텐츠를 내보낸다. 콘텐츠 사이에 광고를 넣어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콘텐츠 제작에 재투입한다.
넷플릭스가 100% SVOD모델(구독료를 내고 플랫폼 내 모든 콘텐츠를 시청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버리고 TV를 닮아가는 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상파 TV가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증명이다.
그러나 사용자의 콘텐츠 소비 방식이 항상 '가치 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사용자들은 비싼 돈을 내면서 OTT를 구독한다. 이제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이미 주도권이 스트리밍과 숏폼 플랫폼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지상파 방송사는 더 이상 '중심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방송사에 남는 것은 '콘텐츠'다. 그리고 콘텐츠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센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드라마'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방송사로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SBS 방문신 사장은 2026년 신년사를 통해 ‘미디어 콘텐츠 기업’이라는 업의 본질에 기반한 미래 성장을 위해 올해부터 콘텐츠 투자를 본격적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스튜디오의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 기획과 제작 지원을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방 사장은 “콘텐츠 경쟁력과 콘텐츠 투자는 ‘10년 뒤 제대로 살아남는 SBS’를 만들기 위한 미래전략”이라고 언급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드라마 또한 우리 공동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는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사람들 가운데 회자되면서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가치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드라마 역시 우리 사회에서 '공론의 장'으로 작용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지상파 방송은 드라마를 포기할 수 없다.
여기서 '드라마를 만들수록 적자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그 사람은 핵심을 짚은 거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첫 번째, 드라마가 원래, 처음부터 '만들수록 적자'였던 것은 아니다. 과거 드라마 제작 환경과 요소, 비용 구조는 지금과 매우 달랐다. 두 번째, 드라마 한 회의 제작비는 최소 10억이 넘어가는데 올해 개봉한 영화 <얼굴>의 제작비는 2억 원에 불과했다. 쉽지 않겠지만 적자가 나지 않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연출자는 더 이상 '직장인'일 수 없다
MBC에는 과거 '드라마 왕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다. 수많은 히트작들이 나왔고 믿을 수 없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랑이 뭐길래> 64.9%, <허준> 64.8%, <보고 또 보고> 57.3%, <대장금> 57.8% 모두 MBC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물론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지상파 방송이 콘텐츠 시장을 장악하고, 광고수입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당시에 만들어진 기록들이긴 하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제작 요소'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본(작가)이 필요하고, 감독(연출/촬영)과 배우도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미술 등 여러 다른 요소들도 필요하다. 이런 제작의 요소들은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넷플릭스가 들어오고, 대형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콘텐츠 판에 큰돈이 돌던 상황에서 이 각각의 제작 요소에 모두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어 '배우 개런티가 높아져도 너무 높아졌다.'는 건 전문가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필자는 다른 측면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제작 요소 가운데 감독(연출)을 따져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지난 10년 간의 환경 변화로 연출은 과거(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들어오기 이전)와 달리 더 이상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구조가 그렇다. MBC만 그런 것도 아니고 KBS도 마찬가지다. SBS는 다르다. 왜냐면 이미 '직장인 연출'이 없다. '직장인일 수 없다'는 필자의 표현이 도발적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고, 그렇게 용기 있게 말할 필요가 있다. 무슨 뜻인지 차근차근 짚어가 보자.
드라마 제작시장의 주도권은 넷플릭스의 상륙 이후 스트리밍 플랫폼(OTT)과 거기에 납품하는 스튜디오로 넘어갔다. 돈의 힘이다. 콘텐츠 제작 시장에 큰돈이 돌기 시작하면서 '능력 있는, 경험 있는' 연출자들이 방송사에서 대거 이탈했다. 연출 레퍼런스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 손해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방송사의 작품 하나가 뜨면 곧바로 연출자가 거액을 받고 스카우트되는 일이 반복됐다. 심지어 기획 과정에서 프로젝트를 들고 떠나는 일까지 생겼을 정도다. 지금 '방송사에는 능력 없는 사람만 남았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과거에 작동했던 재생산 구조가 무너졌다. 연출->조연출로 이뤄지는 도제식 교육, 재생산 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작동할 수도 없다. 검증된 사람이 나갔으니 외부 제작사와 협업을 하려고 해도 시킬 사람이 없다. 분명한 원인이 있는, 헷갈릴 것도 없는 '원인'과 '결과'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보면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방송사에 남은 연출 가운데, 맡게 된 작품의 시청률이 잘 나오고, 그 결과 외부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고 해보자. 이를 거부하고 회사에 남을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례를 찾을 수 있을까? 필자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구조의 문제, 시장의 문제라고 하는 이유다. '더 이상 직장인일 수 없다'는 건 그런 뜻이다.
같은 논리로, 드라마는 '제작 자율성'의 영역이 아니다. 저널리즘으로 석사까지 마쳤고, 언젠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필자가 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제작 자율성'이란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런 거다. 공영방송 직원인 연출자(앞으로도 계속 직원일 예정인 연출자)가, 공익을 위해, 소명의식을 갖고 작품에 임할 때에 쓸 수 있는 말이다.
"내부 연출을 쓰면 예산이 절감된다."면서 직장인 연출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외부 연출을 쓰는 경우, 연출료가 편당 1억 원에 달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게 있다.
예를 들어 방송사에 30명의 연출 인력이 있다고 치자. 매년 회사는 그 인력들에 대해 인건비를 집행한다. 그 사람이 연출을 하건 안 하건 말이다. 회사에 나오건 안 나오건 자리를 제공한다. 매우 '큰 비용'이다.
'과거에도 그랬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때는 맞을지 몰라도 지금은 틀리다. 앞에서 언급했던 '재생산구조'가 작동하는 시절에는, 직장인인 내부 연출자가 재산이던 시절에는 그게 '큰 비용'이라도 방송사의 매우 유익한 투자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 이런 상황이 방치되었을까? 같은 지상파 방송사인 SBS는 먼저 스토리회사를 작게 설립해 키웠다. 그리고 오랜 준비를 거쳐 드라마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처음부터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합병 등의 형태로 대형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IPO를 통해 한몫 잡겠다는 전략은 완전히 틀린 답이다.) MBC나 KBS는 왜 그렇게 안 했을까? 리더십의 문제다.
첫 번째, 공영방송의 사장 선임 구조상, 드라마 문제에 대한 분명한 식견을 갖춘 사람이 사장 후보로 나서기 어렵다. 임원들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드라마가 기획되어 빛을 보는데 최소한 3~4년이 걸리는데,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는 겨우 3년이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다. 필자가 미디어기획국장을 하던 2020년 상반기, 이사회에 스토리회사 설립을 발제했다. 사장 1년 차 시점이었다. SBS와 유사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런데 임원 한 명의 강한 반대로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패키징 중심 조직
그렇다면 드라마를 만드는 조직에 '직장인'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려울 것 같지만 하나도 어렵지 않은 문제다. 이미 답이 나와있다. 드라마를 만드는 곳이면 어디든 드라마 생산 조직은 이미 EP체제(Executive Producer)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EP는 무얼까? EP는 연출과 역할이 다르다. 작품의 '비즈니스와 책임'을 담당하는 수장이다. 기획부터 마케팅, 방영 후 수익 배분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MBC도 스튜디오 EP체제이다."
그렇다. MBC도 형식적으로는 EP체제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인사와 운용이다.
필자는 2020년 7월, A4 3장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 기획국에 전달했다. 드라마를 '패키징 중심 조직'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리회사 설립 논의가 좌절된 뒤였다. 보고서가 100% 원안대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아니지만, 보고서에 담겼던 핵심 아이디어가 현실화됐다. 연출 PD 중심이 아닌, EP 중심 체제가 만들어졌고 MBC 사상 최초로 편성 PD 출신이 드라마 국장(드라마스튜디오 대표)이 되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바로 이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들이 기획되었다. <검은 태양>, <옷소매 붉은 끝동>, <연인>, <밤에 피는 꽃>, <수사반장 1958>,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등등이 이 당시 준비되었던(패키징 되었던) 작품들이다.
그런데 2023년 사장이 바뀌면서 드라마조직의 권력이 다시 연출 PD 출신으로 넘어갔다. 드라마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 MBC가 갖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무언지 취임 초기 의사결정권자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 사장 3년 차인 2025년 말 MBC 내부에서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한 제도 개선이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충분하지 않다. 기회를 개방한 것이지만 책임의 문제를 명확히 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자칫하면 '아무도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상황을 낳을 수 있다.
방송사에 있을 때 이름을 날리다가 밖에 나가서는 제대로 일을 맡지 못하는 연출자들이 종종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제작 일정과 제작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고 들었다. 과거 방송사의 연출들은 자기 욕심에 원래 할당된 제작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이렇게 행동하면 그에게 다시 일감이 들어오지 않는다. 제작사가 남기는 돈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작 환경이 크게 변하면서 제작비 규모도 매우 커졌고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그게 고스란히 적자로 돌아온다. 반대로 예산을 제대로 통제하는 연출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시장의 평가가 좋다.
전술한 바와 같이 SBS의 경우 진작부터 '연출 중심 조직'에서 '패키징 중심 조직'으로 조직의 질적 변화를 이룬 바 있다. 연차가 쌓이면서 제작관리의 'know-how'가 축적되고 있다. 그 중심에 EP와 함께 전문 프로듀서가 있다. SBS는 자사 기획이 아닌 외부 제작사의 기획이라고 해도 작품의 프로듀싱을 제작사에 맡기지 않고 스튜디오S의 프로듀서가 진행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든다. 대본에 제주도의 항구에서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나누는 씬이 있다고 치자. 그 배경에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있다.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이 장면에 들어가는 예산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로 제주 항구에 가서 찍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교통편 제공, 숙박 비옹 등이 들어가니까 관련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 정 반대로 블루스크린에서 찍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CG 비용이 생기고 잘못하면 장면의 완성도가 크게 낮아진다. (참고로 <폭삭 속았어요>의 경우 제주에서 찍지 않은 장면이 상당히 많다.) 물론 연출(감독)의 영향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떻게 비용을 쓸 것인지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프로듀서다.
이런 프로듀서의 역할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된다. 돈을 쓸 데, 돈을 아껴야 할 데를 제대로 가려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CG로 갈 것을 현지 로케로 하거나 조명차를 꼭 여러 대 불러야 할 대목에서 예산이 부족하다고 제대로 지원을 안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런데 MBC는 이런 프로듀서를 제대로 키우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제작사에 맡겨버린다. 이러다 보니 제작사와 제작 예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충돌이 생긴다.
요컨대, 프로듀서는 방송사에서 보유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드라마 제작비, 도대체 얼마나 커야 충분할까?
드라마 제작을 위한 '요소' 가운데 우리는 '연출'과 '프로듀서'를 먼저 살펴봤다. 이제 다른 요소들을 살펴봄으로써 넷플릭스 밖에서, 그러니까 초대형 글로벌 OTT가 장악한 시장 밖에서, 적어도 그 시장에만 목매지 않고 공존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지 따져보고자 한다. 그게 불가능한 거라면 방송사는 드라마를 꼭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가 공염불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 세대에 걸쳐 MBC의 <하이킥> 시리즈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트콤'으로 불리는데 장르로 말하면 코미디 쪽이지만 형식으로 말하면 엄연히 시리즈물 드라마이다. 요즘 시청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MBC 베스트극장>이라는 고정 편성 프로그램이 있었다. 러닝타임 1시간 10분의 '단막극'이다. <하이킥> 같은 시트콤이나 <베스트극장> 같은 단막극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편당 제작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두 번째, 연출은 물론 작가, 배우 등 새로운 '요소'들의 등용문 혹은 검증 기회로 활용되었다. 즉 재생산구조를 작동시키는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아마 '현실을 모르는 순진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목소리를 높일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본다. 첫 번째, 지금 시장에서 주목받는 건, 편당 제작비가 20억이 넘는 초대형 작품들이다.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시트콤은 너무 오래된 포맷이다. 사실이다. 최근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드라마본부가 주체가 되거나 협력한 시도는 아니었다. 세 번째, 그동안 단막극들이 여러 번 실패했다. 그런데 편성 전략이 날카롭지 않았다. 일반 드라마에 비해 예산을 덜 들였다고 하지만 영화 <얼굴>처럼 2억 원 수준인 것도 아니었다.
모든 드라마를 '텐트폴'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작품들로 만들 충분한 돈이 있다면, 매우 유능한 프로듀서들이 있어서 기획하는 작품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줄을 서 사게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런 경우라면, 드라마 제작비는 많이 쓰면 쓸수록 좋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드라마를 패키징 하는 데는 유연한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이라 함은 '텐트폴'은 그에 걸맞게, 그렇지 않은 작품은 욕심부리지 말고 적자를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로 패키징해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과거에 시트콤이나 단막극이 성공했던 이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그 장점을 취해야 한다. 즉 극단적으로 제작비를 낮추는 시도를 해야 하고, 이 시도가 성공할 수 있도록 편성이나 홍보 등 회사의 전체 전략이 작동해야 한다.
영화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여러 시사점을 제공하는 사례이다. 개봉 3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2025년 10월 5일(개봉 25일 차)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제작비는 2억 원이라고 홍보되었다. 러닝타임이 1시간 43분, 일반 드라마 1편보다 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우선 스태프를 일반 상업 영화의 1/3 수준인 20여 명으로 꾸렸다. 참고로 요즘 웬만한 방송사 드라마는 스텝 리스트가 A4 여러 장에 달한다. 촬영 기간 역시 3주, 13회 차로 짧게 잡았다. 배우들의 출연료도 매우 싸게 책정했다. OTT 밖에서 뭔가 해보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다. 혹자는 '연상호 감독의 힘'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러닝 개런티'(작품의 흥행 성적에 따라 추가로 받는 보수)등 구조는 얼마든지 짜기 나름이다.
더구나 지상파는 아직까지도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첫 번째, 흔히 '캡티브 채널(Captive Channel, 콘텐츠를 공급하는 내부 유통 경로)'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지상파는 편성권을 갖고 있다. 즉 지상파에 편성이 되어 방송이 되면 지상파, IPTV(재송신), 케이블 TV, OTT, FAST 등을 통해 시청자를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방송사는 드라마를 홍보할 수 있는 여러 강력한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 즉 TV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유튜브 클립, 인터넷 페이지, 소셜미디어 등등 전략만 갖추고 있다면 전방위적인 홍보가 가능하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
그 어떤 것도 과거와 동일하지 않다. 그것도 5년 전, 10년 전이 아니라 1년 전과도 상황이 다르다. 변화가 발생하다 멈추어 '뉴노멀'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제 노멀은 없다'가 정답이다.
아주 쉬운 예를 몇 개 들어보자. 극장은 1년 전의 극장과 같지 않다. 도미노처럼 극장의 폐관이 이어질 것이다. 2026년 개봉 예정작은 20개 안팎. 투자 구조가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으면서 제작사의 연쇄 도산도 우려된다. 제법 큰 제작사(혹은 스튜디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넷플릭스가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하게 되면 넷플릭스의 콘텐츠 수급 전략이 바뀔 것이다. 투입할 돈이 없는데 이미 비싸진 한국이 매력적일 수 없다. 넷플릭스는 일본이나 다른 동남아 국가로 제작기지를 옮길 것이다.
따라서, 콘텐츠 전략과 플랫폼 전략은 계속 유연하게 변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콘크리트 마켓>은 극장에서 먼저 관객을 만났는데, OTT 웨이브에서 시리즈로 공개되었다. 즉 '극장'과 'OTT'를 엮은 플랫폼 전략을 쓴 것이다. 이 드라마는 컨슈머인사이트의 시청의향률 조사에서 ‘보고 싶은 콘텐츠’ 드라마 부문 1위를 기록했다. 따져봐야겠지만 MBC도 과거의 <베스트극장>처럼 단막극 띠를 만들고, '극장 선공개' 전략을 쓸 수도 있다. 충분히 싸게 만들 수 있다면, 충분히 유연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또 이 과정에서 영화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한 정부 정책 자금의 지원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여러 편씩 선 계약이 되어있던 연출, 촬영감독들도 요즘 일거리가 너무 없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호황을 누렸던 최근 5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 달, 아니 일 주가 멀다 하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AI 도구도 주목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제작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고, 이러한 변화는 멀지 않아 드라마라는 '프리미엄 콘텐츠'에도 압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패키징하고 만들고 홍보하는 전 과정에는 사내의 여러 부서가 관여한다. 아무리 빼어난 전략이라고 해도 어느 한쪽의 단독 플레이로 가면 필히 망한다. 모든 전략은 제작진과, 전략부서, 홍보부서 등의 협업으로 프로젝트의 시작 단계부터 철저하게 손익을 따져, 정확히 얼개를 짜서 실행되어야 한다.
몹시 장황한 글이 되었다.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안다. 필자는 옆에서 살폈을 뿐 드라마를 연출해 보지도 제작해보지도 않은 사람이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한 사람의 아이디어와 생각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실무적이고 전략적인 고려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쓴 이유가 있다. 드라마는 더 미루고 헤맬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결이 시급하다. 조금이나마, MBC의 미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드라마를 다시 일으키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