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불교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널리 확산되어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고려시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불교의 시작은 고대 인도입니다.
인도는 십육대국에서 세력이 커진 나라를 중심으로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마가다 제국(BC 684 ~ BC 424)에서 난다 제국(BC 424 ~ BC 312)을 거쳐 마우리아 제국(BC 321 ~ BC 185) 때는 인도의 영토 거의 대부분을 통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숭가 제국(BC 185 ~ BC 73)과 사타바하나 왕조(BC 230 ~ AD 220)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를 고대 인도 왕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BC 563년. 인도의 16 대국 중 나중에 코샬라공화국에 합병되는 샤카 공화국 (현재의 네팔)의 국왕 슈도다나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수행을 위해 29세에 출가를 합니다. 그리고 35세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능하고 어질다'는 뜻의 '석가', '성자'라는 뜻의 '모니'. 그래서 석가모니라고 불리게 됩니다. 80세인 BC 483년에 열반에 들게 되는데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산스크리트어 : Siddhārtha Gautama). 우리에겐 부처님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불교가 시작되는 시기의 우리나라는 아직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은 중국과의 지속된 싸움으로 힘이 약해지는 시기입니다. 특히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연나라와의 마찰이 잦았는데 BC 4세기 말에서 BC 3세기 초에 연나라의 힘이 커질 때 고조선도 영토를 많이 잃었습니다. 요동 지방을 중국에게 넘겨준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에 두었지만 이 시기에 철기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농기구와 무기들이 서서히 철기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고조선의 힘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철기 문화가 보급되니 새로운 세력이 각자의 자리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중국은 상나라를 이은 주나라가 BC 256에 멸망하는데 이미 BC 770년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춘추라는 말은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BC 770년에 주나라가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깁니다. 호경은 시안(西安) 서쪽에 있다고 추청 되는데 명확한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낙양은 위치가 중국의 한가운데 정도이기 때문에 이때 수도를 옮긴 것을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해서 '동천(東遷)'이라고도 합니다.
동천을 계기로 주나라는 동주와 서주로 나누고 동주가 시작된 BC 770년부터 춘추시대가 시작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자에게 빠져 나라가 망하는지도 모르는 왕에게 제후들이 더 이상 충성하기는 어려웠지요. 그리고 제후국인 진(晉)이 조, 위, 한 3국으로 분열되고, 동주에서 정식으로 승인한 BC 403년부터 전국시대로 구분합니다.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나라들끼리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조금 단순하게 구분하면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왕조는 유지한 채 그 안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시기라면 전국시대는 아예 왕조 자체를 뒤집고 왕이 되려는 7개 나라의 싸움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본은 조몬 시대(약 BC 14500 ~ BC 300)에 몽골계, 중국계, 남방 폴리네시아계 등 수많은 도래인(渡來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인구들이 유입이 되어 지금 일본인들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BC 3세기경부터 시작된 야요이 시대에 전국적으로 벼농사가 전파되어 농경문화가 정착됩니다.
중동 지역에는 BC 2500년 경부터 이어온 아시리아가 BC 붕괴되고 BC 11세기 중반에 메디아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키루스 대왕이 BC 555년에 메디아를 정복하고 BC 539년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마저 멸망시키며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합니다. 우리가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이며 이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군림합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병합하고, 다음 왕인 다리우스 1세 때 인더스강까지 펼쳐지는 최대의 영토가 됩니다.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이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 연합에게 패배할 것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리우스 1세가 BC 490년에 그리스 정벌을 시도했지만 마라톤 평원에서 크게 패배하며 실패합니다. 지금 마라톤이 탄생한 배경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들인 BC480년에 크세르크세스 1세가 다시 정벌을 시도하지만 또 실패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스파르타 정예병 300병이 주축이 된 그리스군의 방어벽을 뚫어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가 영화 300의 소재입니다. 하나의 큰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그리스 정복이라는 전쟁에서는 승리하지 못한 것이죠. 이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크게 패배하며 공식적인 그리스 정벌을 포기합니다.
거대 제국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한 그리스는 다시 내전에 들어갑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필로폰네소스 동맹의 대립으로 시작된 전쟁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합니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60년부터 BC 445년까지 진행되다가 상호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알키비아데스의 모략과 활약이 빛나는 BC 430년에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어 BC 404년까지 이어집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유일하게 먼저 찾아가 스승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주나라가 동천하게 된 이유를 담은 사자성어가 바로 경국지색(傾國之色)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미모라는 뜻을 가진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주나라의 유왕이 남쪽의 포국을 정벌할 때 포나라 사람이 바친 '포사'라는 미인이 있었습니다. 유왕은 포사의 미모에 푹 빠졌지만 포사는 웃지 않았습니다.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다 우연하게 봉화를 피우니 그제야 포사가 웃었습니다. 이후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수시로 봉화를 피웠는데 이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에 봉화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연락하는 중요한 소통도구입니다. 특히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봉화에 불을 피워 도움을 요청합니다. 유왕이 처음 봉화를 피웠을 땐 제후들이 위급한 상황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끌고 출동하였지만 자꾸 반복되자 나중에는 정말 위급한 상황이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중국판 양치기 소년 이야기입니다. 결국 포사는 백복이라는 아들을 낳자 유왕은 정실 왕비인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고 백복을 태자로 삼습니다. 이에 화가 난 신후는 견융을 끌어들여 유왕을 죽이고 포사는 견융족에게 넘어갑니다. 주나라의 왕이 된 의구(평왕)는 견융족을 피해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주나라의 동천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소식을 한 병사가 42.195km를 달려와서 전하고 죽었고 그 병사를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이때 소식을 전했다고 알려진 병사는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인데 페이디피데스의 진짜 역할은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떠난 전령입니다. 마라톤 평원을 달린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까지 240km가 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달린 대단한 병사입니다. 그리고 달리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실제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로 돌아간 사람들은 페르시아 군을 물리친 아테네 중장보병입니다. 전투에서 막 승리하자마자 약 33kg의 완전 군장 차림으로 약 30km 떨어진 아테네까지 뛰어간 것이죠.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 전투 패배 후에 아테네로 다시 공격 방향을 잡았지만 이미 도착한 병사들을 보고 전쟁을 포기합니다. 즉, 마라톤 전투 승리 후에 아테네로 뛰어간 사람은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아닌 완전 군장 차림의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왜 전령이 달려와 죽은 것으로 알려졌을까요? 이 이야기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이 소르본 대학에 있던 지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각색한 것입니다. 평화의 축제라는 올림픽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군인들이 완전 군장하고 뛰었다는 내용보다는 국가를 위해 죽은 애국 청년 전령이 승전보를 전하고 죽었다는 감동스토리로 둔갑했습니다.
또 마라톤 경기가 42.195km가 된 것도 사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42km였지만 1908년에 열린 4회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왕실 사람들이 출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출발선을 윈저궁 육아실 창 아래로 옮깁니다. 그렇게 195m가 늘어나 42.195km가 되었습니다. 이후 몇 번 거리가 달라지다가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1908년 런던 올림픽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어 지금까지 42.195km가 유지되고 있습니다.